[장옥관의 시와 함께] 소설/박상봉

입력 2008-02-05 07:00:00

첫 얼음 얼고 첫 눈 내리기 시작하는 때

쌀독에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때

독을 채우고 있던 쌀이 다 비어지는 때

고쟁이 확 까뒤집어 보듯이 볼장다본 쌀독 속

궁핍이 날카로운 이빨 드러낼 때

목구멍을 간질이던 밥알이 치욕이라는 것,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그런 날

가슴에서 설설 밥이 끓기 시작한다

소설이라는 설익은 밥이 설설 끓는다?

옛날옛적? 朴(박)자 堧(연)자 함자 가진 집안어른이

명절날 앞에 떡 빚을 쌀이 없어

가야금으로 떡을 쳤다는 고사처럼

소설이라는 악기가 살얼음 깨는 소리

쟁그랑 쟁그랑 밥상 차리는 소리

쌀이 떨어지는 날이면 말놀이나 하자. '첫 얼음-얼고-첫 눈', 어릴 적 하던 종이접기 같은 말 겹쳐놓기. '소설-설익은 밥-설설 끓는다', 눈덩이 굴리듯 말에 말을 붙여 굴리는 재미. 놀이에 빠져 정신없이 놀다 보면 고픈 배도 견딜 만하던 것을.

예술(시)은 곧 놀이. 놀이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예술가가 된다. 예술가들은 배가 고파도 고픈 줄을 모르는 '한심한 영혼'들. 쌀 대신 가야금을 선택한 박연 선생의 사례가 바로 그것. 그래서 그 집안 후손인 시인도 쌀 대신 말(小說)로 밥상을 차린다. 소설(小雪)이라는 절기로 쟁그랑 쟁그랑 밥상을 차린다.

기실 밥과 시(예술)는 불편한 관계. 가슴 속에 설설 시가 끓으면 밥은 점점 멀어진다. 지금도 쌀독을 들여다보며 한숨 쉬는 예술가가 한둘이 아니리라. 순결한 영혼들이여, 쌀독 비어 쓸쓸해지거든 소설 날 오는 눈 받아 독을 채우시라. 쌀보다 더 흰빛이 갈증 난 영혼 씻어줄 터이니.

장옥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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