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색 녀]3. 은희경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입력 2008-01-31 15:15:23

그리움도 다이어트 할 수 있을까

소설가 김중혁은 은희경을'브랜드'라고 칭했다. 은희경'표'소설은 그야말로 히트상품이었다. 출간되기 바쁘게 베스트셀러가 됐다.

경쾌하고 냉소적인 그의 소설은 독특한 색깔로 자리잡았다. 아홉 권의 소설책을 내고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색도 조금씩 변해갔다. 화사한 빛깔은 희미해지고 무채색에 점점 다가갔다.

김중혁의 평가처럼"흑백의 풍경 속에서 그는 더 무궁무진한 색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오히려 편안함을 준다.

'상속' 이후 5년 만에 발표한 신작'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역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동인문학상'수상으로 문학적 성취도 얻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은 이렇게 평했다.

"현대의 의식과 욕망을 다룸으로써 대중의 보편적 관심을 얻는데 성공했다." 현재성을 작품에 반영해 대중을 사로잡는 영민함은 그의 소설 '새의 선물'에 나오는 소녀를 닮았다. 게다가'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라는 기막힌 제목을 골라잡은 센스란….

소설 제목은 릴케의 시'두이노의 비가'의 한 구절이다."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소설집에는 모두 6편의 중·단편이 묶여있다. 최근 작을 맨 앞으로 해서 역순으로 배치한 것은 이채롭다.

수록작 중'고독의 발견''의심을 찬양함'등은 판타지 요소를 넣어 전작들과의 차이를 두었다.'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은 은희경이 가장 애착을 느낀다는 작품.

'인생에 변수가 거의 없는 나이가 돼 버린'출판사 사장이 묻어놓았던 청춘을 떠올리는 과정을 담았다. 몽상에 빠져있는 소녀의 이야기'날씨와 생활'은 은희경 표 매력이 여전하다.

표제작'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다이어트 정보로 가득 차 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이 말한 것처럼 '온통 정보로 가득 찬 소설'을 은희경은'천연스레 선보였다'.

사생아로 태어난 뚱뚱한 소년은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다. 중학생 때 처음 본'보띠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란 그림은 그 소년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대학생이 된 이후 아버지를 만난 적도, 소식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는 서른다섯에 아버지의 소식을 접한다. 아버지는 수술을 받으실 것이고 생명도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 그는 그 때부터 다이어트를 결심한다. 달라진 모습을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어서…. 뚱뚱한 아이의 모습을 아버지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어서….

그가 택한 방법은'A다이어트'. 지방은 마음대로 섭취하면서 탄수화물을 금지한다. 지방은 탄수화물을 만났을 때 화학반응을 일으켜 몸 속에 축적되기 때문이다.

다이어트 기간 동안 그는 스스로의 생존본능시스템과 끊임없이 싸운다. 즉 지방을 모아 저장하고 싶은 본능과의 전쟁. 그 본능은 강렬한 탄수화물 섭취의 욕구를 일으킨다.

세상은 지방을 남김없이 태워버려야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곳. "뚱뚱한 사람은 몸집이 커서 눈에 잘 띄는 게 아니다. 뭔가 자신들과는 다르다고 느끼기 때문에 시선이 멈춰지는 것이다."

한 달 동안 12킬로그램 감량에 성공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문상 가서 그는 뜨끈한 국밥을 두 그릇이나 해치운다. 몸속은 탄수화물의 섭취로 흥분한다.

그의 몸을 자극하는 밥 알갱이들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쓰다듬는다. 탄수화물에 대한 욕망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갈구해온 마음과 일치하는 듯하다. 어쩌면 다이어트를 통해 진정 없애고 싶었던 것은 지방덩어리가 아니라 오랫동안 간직해온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을까?

자신을 못 알아볼 거라 생각했었지만 상주가 그를 알아본다. 그리고 액자를 건넨다.'보띠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어린 아들이 한 식당에서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림을 기억하고 아버지는 남겼다.

사생아이며 뚱뚱한 자신을 부끄러워했을 거라 생각했던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 아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아버지의 마음은 체지방이 늘어나는 것처럼 느낌도 없이 차곡차곡 쌓인다.

살이 찌는 것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되돌리기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만큼 몸은 불어있다.

그가 본 또 하나의 비너스.'빌렌도르프의 비너스'다. 2만여 년 전 빙하기에 만들어졌다는 석상은 코끼리 다리에 뒤룩뒤룩 살찐 모습. 그렇게 살찐 여인이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여인. 세상이 바뀔 때마다 각각의 시대에는 아름다움으로 숭배 받는 대상이 창조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숭배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것으로 인해 멸시 당하게 되어 있다.

나를 멸시하는 아름다움을 숭배할 것인가?

갓 지은 밥 한 그릇 먹고 싶다.

전은희kongone@msnet.co.kr

은희경은...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 졸. 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이중주' 당선·등단.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않는다''상속' 장편소설'새의 선물''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그것은 꿈이었을까''마이너리그''비밀과 거짓말'. 문학동네소설상·동서문학상·이상문학상·한국소설문학상·한국일보문학상·이상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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