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백년지대계의 주춧돌만 깔자

입력 2008-01-11 10:15:14

지난해 12월 초 본지는 대구 고교생들의 200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모의고사 성적을 공개한 바 있다. 이 자료를 입수한 뒤, 그 공개 여부를 두고 내부에서도 찬반 논란이 거듭됐고, 마침 2008학년도 수능시험일까지 겹쳐 실제 공개까지는 한 달여가 걸렸다. 이렇게 시간이 걸린 것은 성적공개 전례가 없었고, 고교 서열화 문제와 특정 지역 학교 선호도가 더욱 가속화되는 등 파장이 심각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공개를 결정한 것은 학부모, 학생들은 물론, 학교가 현실을 명확하게 알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등 제기된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는 일이 하루라도 급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 파장은 컸다. 말로만 떠돌던 특정 區(구) 간의 학력격차는 모두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어서 큰 충격을 주었고,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휴대전화 배터리가 하루에 몇 번씩 나갈 정도로 많은 교사와 학부모의 전화를 받았다. 달서구의 고교 교사라고 밝힌 한 독자는 한마디로 참담하다며 이제 어떻게 아이들을 지도해야 할지 자신이 없다는 말로 그 충격을 표현했다.

그리고 새해를 맞았다. 국민 전체의 올해 화두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어떻게 경제를 살릴 것인가 하는 것이겠지만, 가장 급박한 변화는 교육계에서 일어날 전망이다. 실제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정부 어느 부처보다 먼저 교육부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았다. 그리곤 교육부 해체 혹은 업무 대폭 이관에 따른 기능 축소, 자율형 사립고 육성, 대학입시 자율화 등 하루가 멀다하고 충격적인 개혁방안을 쏟아냈다. 그 중에는 전국 초·중·고교의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를 학교별로 공개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다. 본지가 앞서 문제를 제기했던 터여서 최소한 본지 독자들은 충격을 덜었겠지만,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지난 10년 동안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자리 잡은 3불정책(기여입학제, 고교등급제, 대입본고사 불허) 중 기여입학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폐기하자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지금까지 정부의 교육정책은 실제 교육현장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현실을 억지로 외면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부분만 땜질을 하다 보니 마치 풍선효과처럼 다른 곳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평등교육을 하자니 21세기형 인재육성, 혹은 세계경영에 걸맞은 인재육성과 배치되고, 수월성교육을 하자니 교원·시민단체들과 충돌이 생겼다. 학교 정상화를 위해 참여정부가 내놓은 내신 비중 확대는 대학들의 반발로 사실상 무위에 그쳤고, 내신-수능-대학시험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갇힌 학생들의 사교육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졌다. 실제로 우리 아이들은 초교 때부터 혹독한 '공부 고문'에 시달리고 있고, 입시제도는 툭하면 바뀌어 수십 년 동안 대입지도에 매달려 온 전문가들조차 고개를 가로저을 정도로 복잡한 괴물이 됐다.

복잡하고 꼬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 방법이 전혀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을 가끔 본다. 그것은 현실을 인정하고, 문제를 최대한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교육문제도 큰 틀에서 단순화시켜 풀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첫 단계는 정부의 불간섭이 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정부는 공교육 정상화, 사교육비 절감 등 끝없는 노력이 필요한 과제들에 욕심을 내, 수없는 정책들을 쏟아냈고 끊임없이 교육현장을 간섭했다. 새 정부가 털어내야 할 것은 이런 욕심이다. 그리고 교육을 교육주체인 대학 등 학교와 교사, 학생에게 맡기고 정부는 큰 틀의 기획과 조정, 감독역에 머무르면 된다.

이런 점에서 새 정부의 첫 단추는 나름대로 잘 꿴 듯하다. 이제 나머지 단추 꿰기는 교육주체의 몫이다. 현장이 다소 삐걱거리고, 불만의 소리가 튀어나와도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망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백년지대계의 주춧돌만 세우겠다는 마음 하나면 충분하지 않은가?

정지화 사회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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