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시간 앞에서

입력 2008-01-11 07:54:35

흔히 시간은 세월과 같은 말로 통용된다. 세월은 '해' 세(歲) 자와 '달' 월(月) 자로 이루어져 있다. 해와 달로 버무러진 이 세월이란 시간의 커다란 덩어리이다. 세월은 어쩔 수 없이 급히 가버린다는 뜻의 동사를 동반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화살과 강은 시간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자주 쓰여왔다.

인간은 우주의 광대한 시간 운행 속에서 작은 생명체로 살아간다. 밤과 낮의 교차에 따라 일하고 쉬고, 거대한 우주적 시간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 우리들이 해마다 먹는 이 나이란 것도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을 말한다. 또 달의 공전주기와 여성들의 생리주기가 같고 인간 육신의 평균 수명이 70~80년이라는 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 역시 시간의 구체화된 한 형태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시계라는 기계장치를 이용해 가시적인 눈금으로 만들어 놓았다. 한데 옛 사람들은 시간의 큰 단위에 관심을 가지고 삶을 넓은 시야로 바라보았던 반면, 현대인들은 시간의 작은 단위인 분과 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간다.

알람 소리에 일어나 째깍째깍 움직이는 초침에 맞춰 급히 식사를 하고 종종걸음 치며 지하철에 오르고, 출근이나 등교시간, 혹은 약속에 늦지 않을까 조바심친다. 하루에도 수십 번 시계를 들여다보며 이제는 권력이 되어버린 시간의 압박 속에서 쫓기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늘 무언가에 쫓기느라 삶을 충분히 느끼지도 못하고, 그것에 적응할 준비만 하다가 어영부영 세월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서두르느라 사랑이나 기다림, 신뢰, 결속 같은 소중한 가치들을 희생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가끔 삶의 태엽을 아무리 열심히 감고 살아도 빠르게 변화하는 이 가속의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 속도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이따금 느림의 미학이 필요하지 않을까….

마음은 아직 겨울 초입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시간은 어김없이 신년 벽두에 우리들을 세워두고 있다. 새해의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강가를 거닐어 본다. 우리들 앞에 놓여진 또 한 번의 기회, 완전히 새것인 이 시간 앞에 경건하고 엄숙한 자세로 나를 세워본다. 전능하고 절대적인 시간의 권력에서 벗어나 천천히 사랑하고, 충분히 실천하고, 포도주처럼 숙성되어가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서영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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