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예술을 탐하다] ①조각가 김성수의 작업실

입력 2008-01-07 08:27:23

꼭두 인형을 따라 간 작은 우주

공간, 그것은 객관적 실재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머무는 무형의 자리이기도 하다. 그 공간들 속에서 우리는 추억하고 상상하고 성장해 나간다.

좁은 작업실에서 심연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술잔과 선방, 그리고 대금과 첼로, 점 하나와 춤사위 하나도 공간이다. 공간의 이야기는 시간의 추억이기도 하다. 공간은 저마다의 영역과 색깔을 지니고 있다.

예술가도 그 공간 속에서 자기만의 내밀한 풍경들과 만난다. 나만의 공간에서 저마다의 세계를 불러내고, 그것은 다시 우리 모두의 공감의 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공간은 예술가들의 숨결과 몸짓을 통해 고유한 빛과 소리, 그리고 맛과 멋을 드러낸다. 공간은 그렇게 예술을 탐한다.

조각가 김성수의 작업실

투박한 나무 조각에 칼을 댄다. 불필요한 더께를 겹겹이 벗겨내니 나무 속 잠든 여자가 일어난다. 붉은 꽃을 들고서…. 나무토막에서 작은 우주가 깨어나는 순간이다. 비밀스럽게 일어난 그녀는 하나의 세상이 된다.

녹슨 칼로 나무 사람을 깨워내는 조각가 김성수(50). 그의 열여덟 평 작업실에는 나무 인형 500여 개가 저마다의 유토피아를 이루고 있다. 껍데기는 톱밥으로 남고, 오롯이 건더기만 남아 사람이 되었다.

어릴 적 그는 골수염을 지독히도 앓았다.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손자를 끔찍이도 예뻐하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말했다. "할매 죽으면 할매한테 빌어라. 다리 안 아프게 해달라고."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소년은 엉엉 울며 빌었다. "할매, 할매, 내 다리 가져가고 새 다리 다오."

그러나 할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장례식 날 할머니 상여에서 얼핏 본 듯하다. 상여에 꽂힌 꼭두 인형. 꼭두 인형은 죽은 영혼을 행복한 이상세계로 안내한다. 남녀노소의 형상을 하고 꽃을 든 꼭두 인형들은 이승과 저승의 매개다.

할머니도 꼭두 인형을 따라 아름다운 그곳으로 갔을까. 김성수는 12년 전, 그 기억을 되살려 우리를 행복한 세계로 데려다 줄 인형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무 속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깨워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닮아있다. 넥타이 차림의 샐러리맨, 미니스커트를 입은 작부,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 농부 그리고 사색하는 남자…. 그들은 정면을 응시하기도 하고 꽃을 안거나 먹고 있다. 김성수는 이들이 우리를 행복한 나라로 데려다 줄 것을 믿는다.

고단한 샐러리맨은 새를 닮은 로켓에 몸을 싣고 허공을 가른다. 꽃을 한아름 안고 있는 아가씨는 새를 타고 날고, 엄마와 아기는 꼭 안은 채 새 등 위에서 행복하다. 고달픈 삶의 문제는 이들을 통해 희망으로 피어난다. 조각가의 동화는 이렇게 칼로 빚어진다.

"그리운 사람 있으면 그 사람을 만들어보고, 보고 싶은 제자 생각나면 그도 불러내 보고, 어무이도 만나고…"

수백 개의 나무인형을 만든 그는 언젠가는 천 개, 만 개의 인형을 만들 생각이다. 자신의 초심과 마음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시험이다.

구도자처럼, 이 세상 사람들을 각각 닮은 나무인형은 어두운 작업실에서 비상(飛上)하려 한다. 조각가의 작업실을 박차고 농부의 꿈을, 샐러리맨의 행복을 실어나를 것이다. 작은 우주를 만들어내는 조각가의 옹이 박인 손에 그래서 또 힘이 실린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사진가 송호진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