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학생들의 한국 여학생 희롱과 집단충돌사건이 발단이 된 광주학생운동이 1929년 11월 3일 일어났다. 사건의 발단은 10월 30일 오후에 광주에서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광주중학 3학년인 후쿠다 슈조 등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 등을 희롱하는 것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 등이 후쿠다를 응징, 학생들 사이에 편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3일 오전 11시경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과 광주고보의 한국인 학생 간에 또 충돌로 이어지면서 본격화됐다. 광주항거는 서울에 이어 개성 인천 원산 평양 등 전국의 주요 도시로 확산돼 나갔다.
대구에서도 항일의 분위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매일신문 논설위원 출신으로 소설가인 고 장덕조 선생의 유족에 따르면, 당시 대구여고보(현 경북여고)에 재학 중이던 고인이 광주의거에 고무, 광주에 격려문을 보내는 활동 등을 하다가 결국 졸업을 1년 앞두고 서울로 전학했다고 증언한다. 이 운동은 모두 194개 학교에서 학생 5만 4천여 명이 참가,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기록된다.
1953년부터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날을 기념해 매년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1년 중학교 의무교육 실시 결정 ▶1995년 작곡가 윤이상 사망
정보관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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