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농촌체험] (18)상주 병천마을

입력 2007-11-01 07:46:12

"크리스마스때 곶감 먹으러 다시 와요"

깊어가는 가을 산하는 색(色)의 경연장이다. 미당 서정주가 노래했듯, 온 대지를 홀로 누볐던 초록이 제풀에 지쳐 비켜선 자리는 이제 빨간 단풍잎, 노란 은행잎, 하얀 갈대, 황금빛 이삭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회색빛 도시를 떠나 멀리 백두대간 청화산(984m) 자락 병천마을을 찾은 체험객들의 입에서도 연방 탄성이 쏟아진다. "어허, 색깔 한 번 곱네." "이번 체험여행은 단풍구경 하나만으로 충분할 것 같군요."

귀농한 지 6년째라는 길재홍(43) 병천녹색농촌체험마을 대표가 가꾸고 있는 청화산방도 가을에 제법 잘 어울린다. 100개는 족히 넘어보이는, 마당 가득한 진갈색 장독대와 누런 황토집, 탐스런 주홍빛 감이 가지마다 빼곡한 나이 든 감나무까지…. 마음이 절로 여유로워진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청화산인(靑華山人) 이중환 선생이 택리지를 집필한 곳답다.

화사한 가을햇살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비닐하우스 안에는 코흘리개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반시들이 지천이다. 삼백(三白)의 고장, 상주의 명품 곶감이 될 녀석들이다. 절퍼덕 자리를 잡고 앉아 칼질을 해보지만 어디 쉬운 일일 텐가. 깎아놓은 모양을 보고 길 대표가 한마디 거든다. "이게 어디 상주 곶감 되겠습니까? 꼭 밤 쳐놓은 것 같구만."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면서도 정성껏 대들보에 감을 매어 단다. "엄마, 곶감 먹으러 언제 다시 와요?" "크리스마스쯤이면 맛있게 익을 거야. 그때 꼭 다시 오자꾸나."

옆에서는 천연효소 만들기가 시작된다. 열무와 생강을 깨끗이 씻은 뒤 흑설탕을 버무려 독에 넣으면 발효가 돼 효소차가 된다. "200일 정도 지나면 완전 발효가 되는데 이 차 드시면 감기걱정은 끝이랍니다. 저희 집 애들은 이 산중에 살아도 감기 한 번 안 해요." 청화산방 안주인인 유선희(42) 씨의 자랑에 모두들 부러운 눈치다.

마당에서는 가마솥밥이 맛있게 뜸들어가는 냄새가 구수하다. 마을 앞 쌍용계곡에서 자란 다슬기를 넣은 따끈따끈한 가마솥밥은 대도시에서는 구경도 못할 터. 그 큰 솥은 이내 바닥을 드러내고 누룽지 한 조각이라도 더 얻어먹으려는 줄이 금세 길어진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전국에서 유일하게 원효대사의 진영(眞影)이 남아있는 원적사를 둘러보고 온 체험객들은 된장 빚기에 도전한다. 잘 익은 메줏덩이를 장독대에서 꺼낸 뒤 잘게 부수어 다시 독에 넣으면 된다. 하지만 된장냄새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은 코를 감싸쥐기 바쁘다. "아이고, 냄새야!" "원, 녀석들. 냄새가 정겹기만 하구만."

마을 입구에 있는 유기농 콩밭에서 콩수확을 거든 뒤 계곡을 찾아 다슬기를 줍는다. 어느새 맨발로 들어가기에는 물속이 꽤나 차갑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옷이 젖어도, 넘어져도 즐겁기만 하다. 한쪽에서는 겨울잠 잘 준비를 하고 있는 개구리와 물장군을 주워 자랑이 한창이고 눈 밝은 이들은 토실토실 은행 줍기에 여념이 없다.

돌아오는 길, 한 폭의 산수화를 떠올리게 하는 장각폭포에서 이별의 악수를 나누는 길 대표의 손이 따뜻하다. "항상 잊지 말고 우리 농촌을 사랑해주세요. 저희도 열심히 이 땅을 지켜나가겠습니다." "내년 여름에는 꼭 휴가를 내서 올게요. 곶감 그때까지 남겨놓으셔야 돼요."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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