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의병장 허위 선생 손자 게오르기·블라디슬라브 형제

입력 2007-08-13 08:29:05

"이제서야 한국인이 됐습니다"

경북 구미 태생(1854년)의 항일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두 손자 허 게오르기(63) 씨와 블라디슬라브(56) 씨는 허위 선생 사망 100년 만인 이제야 고국으로 돌아와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허위 선생의 막내 허국(1970년 사망) 씨의 두 아들인 이들 형제는 2년 전 한 방송국의 '100년 만의 귀향'이라는 TV다큐멘터리를 통해 항일의병장의 손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 그 후 1년 가까이 노력한 끝에 지난해 7월 키르기스스탄을 포기하고 어렵사리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것도 천정배 법무장관이 당시 특별귀화 256호로 33명의 독립투사 후손들에게 국적 허가를 내주면서 겨우 가능했다.

100여 년 전 구미에 살던 허위 선생 일가는 1915년 만주로 이주했으며, 막내이자 두 형제의 부친인 허국 씨는 만주도 불안해 러시아 연해주로 떠났다. 하지만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온 식구가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 내팽개쳐졌다. 이들 형제는 결혼은 했지만 1991년 구소련연방 해체 후 국가경제가 파탄 나 직장도 잃고 어려운 생활을 계속해왔다.

한국에서 국적을 취득한 두 형제는 달라진 생활을 하고 있다. 형 게오르기 씨는 정착금 4천500만 원으로 아들 블라디미르 보알로자(28·고려대 한국어학원) 씨와 함께 성북구 석계역 부근에 전세방을 얻어 생활하고 있다. 한국말이 아직도 서툴지만 여러 차례 TV에 출연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정원, 대학 등에 나가 할아버지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지질학을 전공한 동생 블라디슬라브 씨는 우크라이나 금광 등 중앙아시아의 자원발굴에 참여하고 있다. 큰아들 알렉산드르는 경기도 안성의 (주)비겐의료기에서 일하고 있으며 고려대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블라디슬라브 씨도 정착지원금을 받아 동대문구 휘경동에 거주지를 마련했다.

이제야 두 형제는 한국인으로서 최소한의 거주조건을 갖추고 밥벌이도 하고 있지만 배우자나 아들은 아직 국적을 취득하지 못해 반쪽짜리 한국가족 신세다.

게오르기 씨는 "아들이 좋은 직장을 얻어 돈을 잘 벌고, 아내까지 귀화해야 비로소 온전한 가족"이라며 "열심히 한국말도 배우고 돈도 많이 벌어서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잘사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그는 허위 선생의 공적사업을 위해 후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허벽(72·9촌) 씨를 소개했다. 허벽 씨는 실제 2년 전부터 이들의 국적취득을 돕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고 10여 가지 각종 서류들을 완성했으며, 방송 출연 등을 통해 이들의 존재를 알리고 조기 국적 취득에 큰 도움을 준 것.

허벽 씨는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구미시장 재직시 약속했던 구미 임은동 일대의 왕산 기념관 및 기념공원 추진사업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그는 "기념관 사업에는 국비가 20억 원이 포함돼 있으며, 2008년 8월이 완공 예정인데 아직 설계조차 않고 있다. 지난 5월 기념공원에도 가 봤는데 공사가 중단돼 있었다."며 구미시가 적극 추진해 줄 것을 촉구했다.

한편 왕산 허위 선생의 나머지 후손들은 미국과 독립국가연합(구 소련)에 거주하고 있으며 셋째인 허준(1956년 사망) 씨는 북한으로 가 김일성에게 처형당했다. 하지만 북한을 탈출해 러시아로 간 둘째 아들 웅배 씨는 모스크바대학 교수가 돼 김영삼 정부 당시 러시아와 수교하는 데 첨병 역할을 했다. 둘째에게서 태어난 허경성(80) 씨는 딸만 있던 큰아들 허학(1941년 사망) 씨의 양자로 들어가, 유족 지원금을 받으며 현재 대구 산격동에 살고 있다.

◆왕산 허위-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격분해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충북 진천까지 진격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일제 침략 당시에는 1907년 경기 북부에서 재차 의병을 일으켜 서울 탈환작전을 펴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하다 일제에 체포돼 190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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