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함께…민초와 함께…
종교에도 '칠전팔기'(七顚八起)란 단어를 쓸 수 있다면, 그 용어가 딱 들어맞는 종교는 바로 우리나라 그것도 우리지역(경주시 현곡면) 용담에서 창시된 천도교가 아닐까 싶다. 민족의 애환과 함께 한 천도교는 1860년 세상을 밝히는 도라는 뜻을 지닌 '동학'(東學)으로 창도된 이래, 1905년 천도교로 개명된 뒤 한때 국내 종교계를 리더하고, 민족을 견인하는 위치에 선 적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는 전성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병희, 오세창, 최린, 방정환, 김구, 이종일 등 암흑기 독립을 위해 투신한 많은 지도자들이 천도교인이었다. 어느 종교도 따라오지 못할 순국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고, 어린이날을 제정한 것도, 민족사학 고려대학교를 십여 년 이상 경영한 것도 천도교였다. 한민족과 명줄을 함께하면서 핍박받았고, 일제의 간교로 말미암아 타격을 입은 천도교는 교세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천도교에서 얘기하는 후천개벽의 세상은 언제인가? 사람은 누구나 어릴 때는 어머니의 젖을, 커서는 자연의 젖을 먹고 산다는 천도교의 자연관은 환경단체들이 가장 선호하는 정신 가운데 하나이다. 검거나 희거나, 사대부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한울님을 모신 평등한 인간이라는 인본사상은 21세기와 부합되는 천도교의 수월성이다. 우리 손으로 만들었지만, 세상을 앞서 끌어간다 싶어서인지 유난히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입도가 많은 천도교의 비상, 성지를 재단장하며 개교 148년을 맞고 있는 천도교인들의 꿈이다.
◈ 최시형이 꿈을 키운 경주와 포항
위인들은 고향에서 핍박받는가? 공생활을 마친 예수가 고향 나자렛에 들어가 핍박받았듯이, 천도교 창시자이자 제1대 교조 수운 최제우와 제2대 교조 해월 최시형도 고향 땅에서 무시당했다. 수운은 참형지인 대구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고, 경주 동촌 황오리(현 황오동 229번지)에서 태어나 포항시 북구 신광면에서 자란 해월 역시 고향땅에서 '잊힌 존재'이다. 아명이 최경상인 불세출의 혁명가 해월은 조실부모하였다. 자연히 머슴살이를 하는 등 모진 고생을 하다가 누이동생과 함께 신광면 기일에 있는 먼 친척집에서 자랐다. 수운이 달을 머금은 함월산 여시바윗골에서 '을묘천서'를 받는 신이(神異)를 체험했다면, 해월은 '해의 터'기일(基日)에서 난세를 구할 꿈을 키우고 있었다고나 할까. 수운과 해월의 만남은 해월이 수운을 자발적으로 찾아가면서 이뤄졌다. 17세가 되자 기술을 익히는 한편, 흥해 경주 영덕 영주 등지를 왕래하며 한지 장사를 하던 해월은 19세에 밀양 손씨와 결혼하여 흥해에서 살았다. 28세 산넘어 신광면 마북으로 옮겼다가, 다시 33세에 마북동 안쪽 금등골(일명 검곡)로 이사를 갔다. 꽃밭네기, 무침밭골 계곡을 끼고, 하늘바라기를 하며 살던 해월은 금등골에 살면서도 "경주에서 명인이 났다!"는 풍문을 듣고 경주 용담정을 찾아 스스로 입도(1861년)하였다.
◈ 멀리 달아나라고 쓴 수운의 혜안
입도한 최경상(해월의 본래 이름)은 금등골에서 용담까지 70리를 오가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수련에 임하다가 마침내 한울님의 말씀인 '천어'(天語)를 듣는 종교체험과 빈 종지로 21일간 불을 밝히는 이적을 경험하였다. 당시 스승 수운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받아들인 듯 조여오는 관의 지목을 초탈, 오로지 동학을 포교하는데만 전념하고 있었다. 득도한 지 4년째이던 1863년 8월 14일, 수운은 최경상에게 캄캄한 밤바다를 훤히 밝혀주는 바닷달과 같은 존재가 되라며 '해월'(海月)이라는 호와 함께 도법을 물려주었다. 이로써 천도교는 동학의 근본을 세운 '말 東學 최제우', 숨어서 삼천리 방방곡곡을 누비며 동학을 확산한 '발 東學 최시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법통을 물려준 지 얼마 되지 않아 체포된 수운이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철종의 죽음으로 한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모진 고문 끝에 사경을 헤맬 때, 해월이 수운을 찾았다. 쫓기던 해월이 옥졸을 매수하여, 변복한 채 나타나자 수운은 말없이 담뱃대를 건넸다. 돌아와서 해월이 뜯어보니 '고비원주'(高飛遠走, 높이 날고 멀리 달아나라) 딱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이미 속연을 다하고 대자연의 품으로 환원할 한 사나이(수운)로부터 막중한 임무를 물려받은 또 한 사나이(해월)가 '고비원주' 글을 보며 피눈물을 삼켰다. 해월은 수운이 들려준 시 한 수를 떠올렸다.
등잔불 물위에 비칠 적에 희미하다 탓하지 말라.
기둥이 말라서 틀어진 것 같겠지만 버틸힘 있다.
◈ 도는 그때그때 생활속에서 적용
자신(수운)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고난이 닥쳤다고 불멸의 동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탓 하지 말고, 어떤 굴욕 어떤 난관도 견디어 세상 끝까지 동학을 전하라. 그 동학을 전하면서 세상을 구할 힘을 바로 너(해월)가 지니고 있다는 암시를 담은 스승의 시 한 수가 '멀리 달아나라'는 절대명령과 함께 겹쳐지면서 해월의 숨이 멎는 듯했다. "그래. 스승과의 세상 인연은 이로써 끝났다. 하지만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정통성을 부여받은 해월은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교조가 효수되는 억울한 참변이후, 심산유곡으로 도망다니면서도 동학을 다스릴 새 틀을 만들었다. 바로 '용시용활'(用時用活)이다. 살아있는 도를 그때그때 생활속에서 적용하고 또 활용해야한다는 용시용활의 정신을 자신에게 먼저 적용시켰다. 본인의 이름을 최경상에서 세상을 형통하게 하려는 시형(時亨)으로 고쳤다. 어두운 세상을 구할 바닷달 해월은 그런 각오로 괴나리봇짐 하나 걸머진 채, 관군에게 쫓기면서 강원도 산골짝에서부터 남도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방방곡곡을 찾아다녔다. 그래서 별명도 '최 보따리'이다. 관헌들은 해월을 잡기 위해 혈안이었지만, 남루한 차림의 보따리 하나 걸머진 반(半)거지를 동학 2대 교조 해월이라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직접 만나본 사람들은 해월이 동학 교조임을 대번에 알았다. "사람은 한울이라 차별이 없으니, 인위적으로 귀천을 가리는 것은 한울님의 뜻에 어긋나느니라." '귀천타파'(貴賤打破)를 강조한 첫 설법 이후,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숨어살며 5리에 하나, 10리에 한 명이라도 만나면 모두 한울님처럼 대하는 해월을 만나면서 자괴감에 빠져 살던 무지렁이, 화전민, 천민들은 달라졌다. 해월은 어느집 며느리가 베를 짜는 소리를 듣고, "한울님이 베를 짠다"는 천주직포설을 설파하기도 하였다.
◈ 해월이 펼친 지하 포교시대
해월은 대도창명의 무거운 짐을 기꺼이 걸머지고 36년간 지하 포교에 전념하였다. 태백산 소백산 일월산 등 산간벽지로 쫓겨다니면서도, 교조신원운동(1872년)을 폈고, 수운대신사가 펴낸 용담유사 동경대전을 수차례 목판으로 간행하여 동학의 터전을 다졌다. 해월이 재간한 동경대전, 용담유사는 현재 천도교 총본부에 잘 보관되어 있다. 해월 말기에는 교세가 전국적으로 퍼져, 무려 수십만 명의 교도를 확보, 전주 삼례(1892) 서울 광화문(1893) 충북 보은(1893) 등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일으켰다. 당국은 동학의 요구를 묵살한 채, 더욱 박해를 가하는 한편 수탈을 더 가했다. 드디어 갑오농민혁명(1894)이 터졌고, 동학군은 일본군과 사투 끝에 30만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해월은 1898년 12월 24일 의암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한 후, 체포되어 이듬해(1899년) 6월 2일 경성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해월 최시형의 참수터이던 한성 감옥소터는 단성사로 바뀌었다가 최근 헐리고 복합멀티플렉스로 둔갑하였다. 문화극장과 피가디리 극장 사이, 도로변 한 귀퉁이에 해월 최시형 참수터라는 표석만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해월로부터 법통을 물려받은 의암 손병희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동학에서 천도교로 개칭한 주인공이면서, 천도교의 보국안민 정신을 일제하 독립운동으로 연결한 장본인이다.
◈ 민족사학 천도교의 힘으로 살려
1905년 12월 1일 천도교로 옷을 갈아입으며 동학은 근대적인 종교체제를 가지게 되면서, 나라에서 법으로 금하던 국금(國禁)의 대상에서도 자유로워졌다. 이른바 신앙의 자유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현도의 시대를 맞은 천도교는 세상을 구할 의무를 여러 갈래로 실천해나갔다. 친일파를 출교시킨 의암은 경술 국치 이후 십여 년간, 교역자 양성과 교세 확장, 교육사업 등을 통하여 구국운동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감히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탁월한 선택이었다. 우선 1911년 12월 경영난에 허덕이던 보성학교(현 고려대 전신)를 인수하면서, 학교 부설 보성사 인쇄소도 함께 인수받았다. 바로 천도교에서 요즘도 지키고 있는 성미(誠米) 운동을 통해서였다. 밥 한숟가락 덜 먹고, 나라위해 겨레 위해 교단 위해 좋은 일 하자는 성미운동이 폐교 위기에 처한 민족사학의 운명을 지켜준 것이다. 그를 기려 고려대학교는 지난해 삼성그룹의 후원으로 지은 1백주년 기념 삼성관 1층 일민기념관 1층에 이 사실을 사진 자료와 함께 패널로 만들어 후세에 알리고 있다. 고려대 박물관(관장 최광식)에는 손병희를 중흥자로 표현하며, 동학의 성미로 보성전문을 살렸다고 적었고, 손병희의 보성전문학교 인수를 제대로 알리고 있다. 인촌 김성수 동상이 고려대 본관 앞에 우뚝 서있는데 비해서, 문과대 입구에 약소하게 서있는 의암 손병희 흉상이 뒤늦게나마 위로를 받는다고나 할까? 보성사는 기미 3·1운동 선언서 3만 5천 부를 찍은 바로 그 인쇄소로 현재 서울 연합뉴스 뒤편, 조계사 뒤 소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보성사는 없어지고, 보성사 옛터를 알리는 동판과 독립운동상이 조성되어 있다. 의암이 독립운동을 위해 조직을 키운 장소가 바로 강북구 우이동 봉황각이다. 의암은 일경의 추적이 심해지자, 낮에는 술을 마시며 파락호 같은 생활을 하다가 밤이면 우이동으로 달려갔다. 위장을 위해 흠뻑 술에 전 모습으로 후학들이 훈련받고 있는 우이동 봉황각을 찾은 의암은 말없이 기둥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단 한 마디의 독려도 없었지만, 그곳에 모인 청년 후학들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훈련해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3·1운동이 갑자기, 그렇게 조직적으로 한꺼번에 터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글·사진 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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