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따르면 인간들이 하늘에 닿으려는 시도로 '바벨'이라는 이름의 탑을 쌓았다고 한다. 결국 그러한 인간들의 오만은 조물주를 진노케 했고, 그 벌로 서로 말이 안 통하게 되었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 때문에 우리가 지금도 외국어를 배우느라 고생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같은 나라 말이면 모두가 서로 잘 알아듣느냐 하면 사실은 그것도 전혀 아니다. 수백 년 전과 현재의 말이 서로 다르고, 현재라도 제주도의 방언은 육지 사람들이 알아듣기 힘들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동시대를 살면서 같은 지역에 거주하더라도 말이 잘 안 통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요즘 방송에서는 '십대들의 대다수가 모르는 말'이라는 프로그램도 있고, 거꾸로 지금 10대 네티즌들의 통신 용어는 부모들이 이해하기가 힘들다.
일상의 생활용어가 이러하니 전문기술용어나 학술용어로 가면 더 말할 나위가 없어진다. 자동차나 선박의 생산 공장, 또는 대형 건축물의 공사 현장이 아니더라도 동네 자동차 수리하는 곳, 또는 집의 냉장고를 수리하러 온 사람들의 말도 도무지 알아듣기가 힘들다. 그러니 병원의 진료현장에서 쓰이는 의학용어의 경우야 오죽하랴. 흔히들 주로 영어라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의학용어는 우리말로 말해도 어렵긴 마찬가진데 미국 사람들 역시 자기네 의사들이 영어로 질환에 대해 설명을 해도 종종 "제발 영어로 이야기해 줘요!"라고 한다. 단어에 라틴어 등이 섞인 것은 어차피 우리말에도 한문이 들어간 것과 같다. 그러니 이런 경우에 "영어로 이야기해."라는 표현은 "알아듣기 쉽게 말해."라는 뜻이고 미국에선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누가 어렵게 이야기할 땐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이렇듯 의학용어는 어느 나라나 자기네 말로 해도 어려우니 자연히 환자들의 불만도 많다. 특히 우리나라는 모든 국민들이 거의 '반(半)의사'라고 불릴 정도로 건강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만큼 "의사들이 내가 알기 어려운 말들을 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분도 계실 것이고 "영어와 한문의 사용은 사대주의의 표방이다."고 주장하는 끓는 피의 민족주의자도 계실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엔 일부 의과대학의 교수들이 이런 영어와 한문 용어들을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려는 힘겨운 시도도 했지만 북한의 용어들처럼 생소해 환자들은 물론이고 기존의 의사들마저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해프닝이 연출됐다.
그러니 이쯤에서 나는 이런 의문을 가진다. 용어에 대한 주체성의 문제는 따로 논하더라도 과연 우리가 다른 전문영역의 말들을 모두 알아야하고 또 이해해야만 하는가. 사실 그것은 어려움을 떠나서 거의 불필요하고 소모적이다. 그렇다면 지금 정말로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의사와 환자 간의 더 많은 대화이고, 또 대화의 방식이지 기존의 전문용어를 바꾸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혼자 해 본다. 국가 간에도 상대방과 다른 문화를 배려하는 자세가 없이 배운 외국어는 오히려 서로 간에 몰라도 될 갈등만을 부추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고장을 찾은 외지인에게 길을 가르쳐 줄 때는 그 사람이 알아듣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 차라리 길 이름을 쉬운 것으로 바꾸는 것보다 더 낫지 않을까.
또한 이해하기 쉬운 것만이 반드시 해답은 아닌 경우도 있어 우리 의과대학에서 있었던 오래 전의 실화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당시의 시험 문제는 '항생제의 종류에 대해 쓰시오'였고 답은 '1) 페니실린계 2) 세팔로스포린계 3) 퀴놀론계 4)…등등'이었는데 너무나 기발하고 직관적인 답이 있어 교수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답인즉슨 '1) 먹는 약 2) 바르는 약 3) 주사 약'.
정호영(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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