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미국과의 수교 125주년

입력 2007-05-18 09:07:43

'미국에 머물 때 그 나라 사람이 과연 우대해 주었는가. 그 나라가 그렇게 부강하다는데 과연 그러한가. 그 나라의 법규가 周密(주밀)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그 기질이 매우 순박한고로 우리나라 사람을 대하는 데서도 또한 매우 우대합니다. 그 나라의 부강은 비단 금은의 풍요나 군대의 강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안으로 잘 다스리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인다는 점에 있습니다. 官人(관인)으로서 말하면, 국가의 일을 가정의 일과 같이 보아 각기 각기 그 관직의 정해진 법규를 지키고 한 마음으로 게으르지 아니하며 백성으로 말하면, 士農工商(사농공상)이 각기 그 맡은바 일을 행하며 놀고 먹는 사람들이 거의 없으니 재물은 이로부터 말미암아 부강한 것이요, 규범은 이로부터 말미암아 주밀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125년 전인 1882년 5월 22일. 조선은 제물포(인천)에서 미국과 朝美(조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을 노리는 淸(청)나라와 일본 등 주변 불량이웃을 견제, 나라를 지키려 했다.

특히 조약 제1조에 '제3국으로부터 不公輕侮(불공경모·불공정하거나 깔보고 업신여김)하는 일이 있을 경우 必須相助(필수상조)한다.'는 규정을 두어 조선은 미국과 연대(聯美), 당시 조선을 괴롭히던 淸日(청일)을 견제하려 했다. 게다가 조선은 이듬해(1883년) 미국에 파견된 報聘(보빙)사절단에게 한 아서 대통령의 "미국은 다른 나라 영토를 점령, 지배할 의도가 없다."는 발언에 무척 고무됐던 터이다.

그러나 조선은 재정난과 청나라의 방해로 미국에 상주 공사관을 두지 못하다 1887년 11월에야 박정양을 초대 공사로 파견했다. 조선은 1891년이 돼서야 당시로서는 거금인 2만 5천 달러로 워싱턴의 건물을 사들여 大朝鮮 駐箚 美國 華盛頓 公使館(대조선 주차 미국 화성돈 공사관)을 설치할 수 있었다(이 건물은 한일강제병탄으로 단돈 5달러에 일본에 팔렸다).

하나 초대공사 박정양은 청의 압력으로 결국 1888년 11월 소환됐고 귀국 뒤 고종에게 미국방문 경험을 아뢰었고 이에 고종은 앞으로 '아름다운 나라' 美國(미국)이 조선에 큰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가졌다.

고종의 미국에 대한 '환상'은 1904년 러·일 전쟁으로 산산히 깨졌다. 1905년 9월 러일전쟁 뒤 미국 포츠머스에서의 조약에 앞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요즘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테디 곰 인형은 그의 애칭 '테디'에서 비롯됐다)은 그해 7월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를 일본에 보내 카쓰라 다로 총리와 密約(밀약)을 맺게 했다.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카쓰라-태프트 밀약'이 그것이다. 조선과의 조약은 한낱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오는 22일이면 한·미 수교 125주년을 맞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神(신)을 믿는 나라다. 미 달러 지폐에 '우리는 신을 믿는다.'(In God We trust)는 문구가 있고, 정치인들이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America)라면서 연설을 마치듯 말이다. 미국은 적절하게 자신들의 '신'을 잘 활용했다. 미 대륙의 원주민 인디언을 대학살하며 서부로 서부로 영토를 확장할 때도, 멕시코 땅 텍사스와 캘리포니아지역을 전쟁으로 빼앗을 때도. 지금 이 시각에도 미국 '신'은 지구촌 곳곳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 4월 2일 타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마치 '새로운 미래'를 약속이나 하는듯 호들갑 떨었는데 느닷없는 미국 측의 재협상 요구 움직임은 무슨 의미인가. 미국과의 밀약으로 조선을 삼키고 2차대전까지 일으켰다 패망한 뒤 미국 도움으로 세계 강국이 된 일본의 재무장화를 위한 헌법개정 움직임은 또 무엇인가. '순진한' 조선을 亡國(망국)으로 이끈 미국과 일본, 국토분단을 초래한 중국과 러시아. 이들 틈바구니에 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한·미 수교 125주년과 관련,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는 최근 매일신문 등과의 인터뷰에서 "한·미 관계는 공고하고 상호 존중이 중요하다."면서 "자축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축하했다. 마냥 자축만 하기엔 우리 마음이 무겁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東西(동서)·南北(남북)·世代(세대)·빈부(貧富)·左右(좌우)·保革(보혁) 간 갈등도 그렇고.

정인열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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