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잃은 두 자매 엄마 장애우 김명옥씨

입력 2007-05-17 16:47:44

12평 아파트가 그렇게 좁은 줄 미처 몰랐다. 현관에 놓인 휠체어 탓에 옆으로 종종 걸음을 쳐야 간신히 오갈 수 있을 정도. 오후 3시가 가까운 시간에 늦은 점심 식사를 하던 김명옥(48) 씨는 들어서는 기자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한다. 김 씨는 소아마비 때문에 왼쪽 팔을 쓸 수 없고, 혼자서는 거동조차 못한다. 식사를 도와주러 온 자원봉사자(이 분도 장애우였다)는 기자에게 "조금만 늦게 오시지."라며 핀잔 아닌 핀잔을 준다. 손님이 왔다며 식사도 못하고 상을 물리는 김 씨를 보며 안쓰러워서 해보는 말이다.

대구 수성구 범물동 용지아파트 403동 603호. 이 곳이 김 씨와 엄소희(16), 주희(10) 두 딸이 사는 보금자리다. 만 7년 전 끔찍한 사고가 나기 전까지 이 곳은 작지만 네 식구가 함께 살던 아담한 둥지였다. 한 쪽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장애우였던 아버지는 지난 2000년 6월 1일 일을 나갔다가 삼륜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만촌네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를 알리는 급박한 전화가 걸려왔지만 김 씨는 달려갈 수 없었다. 생명이 위태롭다는 병원 전화를 받고도 이틀 뒤에야 이웃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가볼 수 있었다. 이틀 동안 가망없는 생명의 줄을 아스라히 잡고 있던 남편은 아내의 얼굴을 보고서야 비로소 눈을 감았다. 주위 사람들은 "애 엄마 얼굴이라도 보려고 이렇게 버티었나보다."라고 입을 모았다. 횡단보도에서 오토바이를 끌고가다가 난 사고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쌍방과실로 판명났고, 3년간 지리한 공방을 벌인 끝에 겨우 보험사로부터 위로금 몇 푼 받았을 뿐이다. 그 때 일이 너무 원통하고 분해서인지 중학교 3학년인 큰 딸 소희는 꼭 검사가 되겠다고 한다. 힘 없고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서란다.

그렇게 떠나보낸 남편을 생각하면 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진다. 김 씨는 32살이 되던 해, 외로움을 담은 편지 한 통을 한 신문사로 보냈다. 그 사연을 보고 하루에도 대여섯 통의 편지가 날아오고, 전화도 많이 받았다. 남편도 그렇게 편지를 보낸 사람 중 한 명. 장애우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비장애인의 공개 구혼도 뿌리치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소희가 태어났고, 그렇게 귀여워하던 막내 주희도 태어났다. 하지만 두 딸의 재롱도 다 보기 전에 아버지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죽음의 의미를 채 깨닫지도 못할 나이였던 아홉 살 소희는 목매어 울었다. 갑자기 세상이 무섭고, 외로워졌단다.

현재 생활은 생계보조금 70여만 원과 복지관에서 나오는 부식 구매권으로 꾸려가고 있다. 반찬값을 아껴가며 생계는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지만 아이들 공부가 걱정이다. 소희는 영어와 수학 단과반 학원에 다니고 있지만 막내 주희는 학원은 꿈도 못꾼다. 대신 학교에서 실시하는 방과후 수업을 듣고 있다. 내년은 더 걱정이다. 소희가 고등학생이 되면 학원비 부담도 더 커질 수 밖에 없기 때문.

책상 하나 놓고나면 다리를 뻗고 잘 수조차 없이 비좁은 방도 걱정이다. 19평으로 옮기고 싶지만 관리사무소측은 규정상 안된다며 난색을 표하고, 세 식구면 15평은 가능하지만 빈 집이 없어서 그것도 안된다고 했다. 이래 저래 걱정 뿐일 것 같은데도, 세 식구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소희는 학교를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떠들고, 주희는 막내답게 집안 분위기를 이끄는 주인공이다. "그저 건강하고 밝게 자라주니 너무 고맙죠. 다만 아이들은 커가는데 집이 너무 좁아서 걱정입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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