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 때 당쟁의 뿌리를 뽑기 위한 방책의 하나가 '탕평책'이라고 했던가. 어느 날 영조의 식탁에 청포묵에 각종 고명을 섞어 무친 음식이 나왔는데 이를 가리켜 '탕평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청포묵무침이 '탕평채'란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된다. 탕평채는 청포묵에 쇠고기와 싱싱한 갖가지 야채, 계란, 김 등을 얹어 버무린 묵무침이다.
청포묵의 밝은 흰색과 매끄러운 감촉은 숙주 오이 당근 미나리 등 사각거리는 야채와 어우러져 조화롭다. 이는 영조의 정책이 배어든 것 같은 음식이기도 하다. 이처럼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고르다는 뜻을 지닌 탕평채는 영양학적으로도 완벽한 균형을 갖춘 음식이다.
녹두의 녹말로 만든 청포묵의 탄수화물과 계란 고기의 단백질, 김 미나리 숙주의 비타민과 무기질 등을 고르게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 시각적으로도 우리 민족 고유의 기본색인 오방색을 갖춘 음식으로 어르신들도 쉽게 소화할 수 있으며 열량이 낮아 다이어트 건강식으로도 그만이다.
20세기 초 일본의 이케다 기쿠나에 박사는 단맛 짠맛 신맛 쓴맛 등 4대 미각 외 제5의 맛으로 우마미(감칠맛)를 발견했다고 한다. 맛이란 게 꼭 혀로만 감지되는 건 아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맛도 있는 법이다.
안동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하루 머무는 동안, 그곳 별미라는 '태평초'를 먹으러 가자는 이끎에 '별 희한한 음식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따라나섰다. 육수가 담긴 양은냄비가 불 위에 올랐다. 돼지고기와 묵은 지와 각종 야채와 양념, 마지막에 듬성듬성 칼질을 한 메밀묵을 곁들이고 기다리니 미리 끓고 있던 국물이 자작자작 소리를 냈다.
친구는 이제 먹어도 된다는 눈짓을 해 왔지만 숟가락이 가지 않았다. 툭사발보다는 장맛이라며 한사코 권하는 친구의 인정에 못 이겨 떠먹어 본 안동 특유의 태평초는 뒷맛이 수더분하면서도 깔끔했다. 메밀묵의 무미(無味)함이 담백하고도 맛깔스런 맛의 조화를 이루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태평초는 탕평채의 변형일까. 사실은 태평초의 고른 영양과 감칠맛 나는 맛도 맛이지만, 그 속에 녹아있는 영조대왕의 탕평책을, 가슴으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탕평(蕩平)하지도 않는 세상에서 태평을 바란다고 그 태평이 이루어질 리 만무하지만…
김정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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