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닉 에세이] 공치사에 약한 의사

입력 2007-05-10 17:07:57

조용한 봄날 오후다. 중국의 황사가 한반도를 강타하여 병원의 공기 청정기는 연신 소프라노 모터소리를 뿜어낸다. 나른하다.

그런 오후에 그는 나를 찾아왔다. 날렵한 체구에 조각상 같은 이목구비가 나를 은근히 긴장시킨다. 고백하건데 나는 다소간 날카로우며 직선형 체형을 선호한다. 그런 체형들은 까닭 없이 호감이 가며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는 수려한 외모에는 어울리지 않게 음울한 시인의 표정을 하고 진료실을 들어선다. 매혹적인 외모에 사색적인 분위기는 낭만적인 남성의 표상으로 여성의 심성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나 역시 여성으로는 빛바랜 사십대이지만 여인이기에 풍부한 감성으로 그의 진료에 임했다. 그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탈모로 극심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타인에게 발생하는 암이나 에이즈보다 더 심란한 불치병이며 목숨과 바꿀 만큼 중병으로 각인된 그에게는 탈모 치료가 곧 죽음의 나락에서 구하는 길이였다.

두피나 모발 상태를 컴퓨터 진단해보니 우선 두피에 홍반과 가피를 동반한 심한 염증과 이차적으로 가역적 탈모와 연모의 소견이 나타났다. 그에게 치료의 방침을 설정해 주었고 그는 우직 하리 만큼 꾸준히 병원의 치료 지침을 따라 주었다.

삼 개월 후 그의 두피 촬영 결과는 피부과 교과서에 인용할 수 있을 정도로 표준상태로 돌아 와 있었다. 이런 결과는 나의 무공 탓이라기보다는 환자의 열성적인 치료 태도, 환자가 재생력이 좋은 청년기의 젊은 나이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우아한 어머니 까지 찾아와서 치료 결과를 나의 공으로 돌릴 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태도로 그들의 공치사를 인정하는 뻔뻔함으로 봄날만큼이나 나른한 또 하루를 보냈다. 이 순간만이라도 이 세상 누구보다도 명의가 된 듯한 착각으로 보낸 아름다운 하루였다.

정현주 (고운미 피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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