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서울 강남 번화가에 친구와 약속이 있어 간 적이 있었다. 약속장소는 생긴 지 오래되지 않은 듯 크고 번듯한 생맥주 전문점이었는데 저녁 6시에 손님은 하나도 없고 제복을 입은 종업원들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것은 바깥에서 혹 지나가다 들여다보는 사람이 손님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윽고 도착한 친구 역시 자리를 안으로 옮기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생맥주 전문점은 유럽 어느 나라의 전통 방식 그대로 맥주를 자체적으로 생산 판매하는 곳이었다. 유럽의 고성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내부 장식이 되어 있었고 한 번에 300~400명은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이 큰 홀을 어떻게 채우는지, 투자한 돈을 뺄 수나 있을지, 우리 두 사람은 계속 걱정을 해주면서 100㏄에 1천 원이라는 비싼 가격의 생맥주 300㏄ 두 잔을 주문했다.
종업원이 재빠르게 가져다 준 맥주의 첫 잔, 첫 모금을 마시고 나서 마주 앉은 우리 두 사람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이 맥주 괜찮다."는 말이 나온 것은 비싼 가격 때문은 분명히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국내외의 여러 맥주를 여러 장소에서 마셔왔으니 실내장식이나 구릿빛 발효탱크 따위에 주눅이 들 수준은 아니었다.
정말 맛이 괜찮아서 괜찮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괜찮은 맥주를 파는 곳이 장사가 안 되어서 금방 망해 버리면 어떻게 하겠느냐, 망하지 않게 손님이 많아야 될 터인데 하고 함께 걱정하는 동안 맥주잔은 빠르게 비어갔다.
동시에 도대체 우리나라 맥주는 왜 아무런 특색이 없을까 하는 걱정이 이어졌다. 새로운 술잔이 도착하고 그 맛이 첫맛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걱정은 성토로 변했다. 우리나라 맥주 회사에서 생산하는 병맥주는 상표를 떼면 구별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지나칠 정도로 차게 해서 준다는 것도 비슷하다. 그나마 있는 맛은 오로지 차서 '시원하다.'는 독불장군 격의 느낌에 묻혀 버린다. 그게 우리나라 맥주를 이십여 년 넘게 마셔온 두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고 두 사람이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 역시 동의할 만한 생각이라는 데 두 사람 모두 일치했다.
어쩌면 두 사람이 마시고 있는 유럽식 맥주가 생산 현장에서 곧바로 마실 수 있는 맥주라서 살아 있는 효모의 맛을 느끼기 힘든 병맥주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생맥주 역시 몇 년 전부터 병맥주처럼 별 개성을 느끼기 힘든, 그저 차기만 하고 상대적으로 값싸며 파는 곳이 많다는 것 말고는 특별할 게 없지 않으냐는 결론이 나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일곱 시가 되고 여덟 시가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그 넓은 홀이 꽉 차 있었다. 우리 주변에 삼십여 명쯤 되는 사람들이 자리가 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 이상 두 사람만의 대화가 힘들 분위기라고 판단한 우리는 그곳을 나가기로 했다.
일어서는 기미를 보이자마자 무전기를 든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자리를 정리했고 안내를 받아 간 계산대의 일 처리 역시 신속하고 잘 훈련되어 있었다. 밖으로 나와서 우리나라 맥주에 대한 성토는 다시 걱정으로 변했다.
정해진 유통망, 정해진 경쟁구도 속에서 별다른 불평 없이 꾸준히 마셔주는 소비자 덕분에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지만 또 다른 유럽의 맥주 강국, 이를테면 체코·벨기에·독일·네덜란드·덴마크·아일랜드에 미국·일본·영국, 기타 국제 기준의 경쟁력 있는 맥주가 들어오면 계속 이런 식으로 갈 수 있을까.
고급 시장은 이미 잠식당하고 있고 대중적인 시장 역시 안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게 두 사람의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생각은, 문제는 맥주만의 것이 아니라는 데서도 일치했다. 기호품이나 명품 시장에서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거리는 과거에 비할 수 없이 가까워졌고 앞으로 점점 더 가까워질 것이다.
국가니 민족이니 우리끼리니 하는 식으로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의 마케팅 전략은 점점 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제 어디 좀 편한 자리로 가서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생맥주나 한잔 마시고 들어가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은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요새 그런 곳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 역시 같았다.
성석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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