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맞닿은 길…숨막히는 걸음, 숨막히는 장관
이틀 째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가지고 온 옷가지들을 있는 데로 배낭에서 꺼내어 껴입었지만 갈라진 나무판자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에는 역부족이다. 쉴 새 없이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정좌를 하고 앉아 새벽이 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숨을 쉬기조차 어렵다. 마치 몸에서 정신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아 몇 번이고 머리를 흔들어 보고 호흡을 가다듬어 보지만 오히려 두통과 한기는 더해질 뿐이다. 두렵다. 새벽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이 기다림의 고통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세상을 바꾸겠노라고 소리치며 떠난 못난 아들을 한없이 기다리던 어머니의 그 길고 긴 고통을 느껴보라는 것일까? 아니라면 지금껏 숨 가쁘게 살아온 방식이 얼마나 어리석은 시간인지를 돌이켜보라는 것일까? 아니 그도 아니라면 어린 왕자의 말처럼 사랑은 기다리는 것이고 그 기다림이란 다른 이를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몇 번이나 시계를 들여다보았을까? 잠깐 졸았다고 생각한 순간 꿈처럼 누군가 방문을 두드린다. 가이드 유진이다. 침대에서 내려서다가 넘어지고 만다. 본격적인 고소증이 온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설 순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밖으로 나간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어둠 속으로 안개는 자리를 내어주고 먼 하늘 위로 산봉우리들이 푸른빛으로 조금씩 자리를 찾고 있다. 새벽 5시, 아침으로 나온 달걀부침 하나와 짜이 한잔마저도 부담스럽다. 쏘롱 고개를 넘어 목적지인 묵디나트까지 장장 8시간 동안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곳은 비수기인 탓에 단 한곳도 없다. 더구나 이곳에서 준비해 갈 수 있는 식량이라고 해봐야 삶은 달걀과 비스킷이 전부인 탓에 가이드는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푸른 산봉우리를 향해 무작정 발걸음을 내딛는다. 하지만 겨우 10분 만에 그나마 먹은 것을 모두 올리고 만다. 등을 두드려주던 가이드 유진이 다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는다. 고개를 젓는다. 마음 한편에서는 어리석은 집착이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넘지 않는다면 평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 그랬다. 살아가면서 타협하고 포기하는 것은 일순간이다. 그러다가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변명을 만들고 다들 그렇지 않느냐고 자위하면서도 결국 가슴은 지키지 못한 열정과 연민으로 앓아야 했다. 결코 두 번 다시 똑 같은 후회를 되풀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되돌아 내려가야 할 길이 올라 넘어야 할 길 보다 더 멀고 괴로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위로가 된다.
5,000m 쯤 올라 왔을까? 잠깐 쉬는 동안에 올려다 본 하늘에는 긴 그리움처럼 만삭의 낮달이 외로이 떠 있다. 순백의 설산 위에 떠 있는 하얀 달은 숨이 막힐 듯이 아름다웠지만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왈칵 밀려온다.
11시 30분, 예정보다 이미 두 시간이 지난 후에 드디어 쏘롱 고개에 닿는다.
"당신의 도전 중의 하나인 쏘롱 고개의 성공적인 등정과 통과를 축하합니다."
고개에 자리한 작은 찻집은 굳게 문이 닫혀있고 빛바랜 표지판만이 외로이 반긴다. 오가는 이들이 쌓아올린 돌탑 위에 낡은 룽다가 거센 바람에 소리 내어 울고 있다. 인간의 일상이 만든 길 중에 가장 높다는 쏘롱 고개는 하늘에 맞닿아 있지만 이렇듯 외롭고 쓸쓸하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중요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내 친구 여우가 말했어."
외로움에 몸을 떠는 여행자에게 어린 왕자가 말한다.
얼마나 더 자신의 안으로 걸어야만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비워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어른들은 왜 마주보는 것에 집착하지, 그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다. 마주본다는 것은 욕심의 다른 이름이다. 내 것에 대한 욕심은 마주보기를 강요하고 그것이 사랑이라는 착각을 낳는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가슴 속 깊이 흐르는 강물은 마르지 않는 것인데도 눈으로 보는 것에 길들여진 일상은 늘 메마르다.
30분 남짓 쉬었을까? 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이제 내려가는 일이 남았다. 묵디나트로 향하는 길은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조차 없는 끝도 없이 이어진 가파른 자갈길이다. 포터 쪼루가 앞장을 서고 가이드 유진이 제일 뒤에 서기로 했지만 고소증세로 제대로 걷기가 힘들다. 결국 자갈길에 미끄러져 이마가 찢기고 만다.
"걸을 수 있겠어요"
가이드 유진의 말에 부끄러워 몸을 일으켜 보지만 몸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서 묵디나트까지는 4시간, 지금의 걸음대로라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기가 어렵다. 결국 쪼루가 먼저 마을로 가서 부축할 사람과 말을 데려오기로 한다. 조금이라도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걷기와 쉬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묵디나트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아득하긴 했지만 노란 밀밭 사이로 보이는 흙집들은 지친 여행자에게는 이곳 사람들의 말처럼 묵디나트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아직도 두 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 짐을 내려놓고 쪼루를 기다리기로 한다. 하지만 쪼루는 술에 절어 제대로 걷을 수나 있을까 싶은 노인을 데리고 왔다. 비수기인 탓에 말은 먹이 때문에 풀어 놓아 구할 수가 없고 그나마 이곳까지 오겠노라는 사람이 그 노인 밖에 없었노라고 한다. 온 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노인에게 작은 배낭을 맡기고 쪼루와 유진이 번갈아 업고 부축하며 길을 내려온다. 그들의 등에 이마에 흐르는 땀은 살아가는 내내 잊지 않아야할 고마움이다.
해가 어둑해질 무렵, 드디어 묵디나트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힌두교 사원과 불교 사원이 아무런 경계 없이 한 울타리 안에 자리하고 있다. 네팔 힌두교 2대 성지의 하나인 힌두 사원과 티베트 불교의 구심점인 불교 사원이 하나로 어울리고 있는 모습은 종교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숙소의 이름은 자메이카의 레게 가수 이름을 딴 '밥 말리' 호텔이다.
"음악으로써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깨우치고 미래에 대해 듣게 할 수는 있다"고 외쳤던 그를 이곳 히말라야에서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그가 언젠가 돌아가고자 했던 약속의 땅은 아프리카였지만 히말라야인들 또 어떠랴!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거침없는 노래를 들으며 아득한 꿈속으로 빠져든다.
전태흥 (주)미래데이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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