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의 스타토크] 배우 이순재

입력 2007-03-08 16:58:53

MBC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한의사로 등장해 아들에게 거침없이 발길질을 날리는 가부장적인 모습에서 어느 날 식구들의 눈을 피해 컴퓨터를 몰래 켜고 야한 동영상을 찾아 보다가 가족들에게 들켜버리는 배우 이순재. 이 장면 때문에 '야동 순재'라는 유행어를 남기고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를 차지할 만큼 거침없는 인기를 누리는 그는 72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다.

녹화대본이 올려진 테이블 위에 안경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첫 마디를 꺼낸다. "배우라는 게 가능하면 백지 상태가 돼야 해. 그 백지를 채우고 또 채워가는 게 배우이고 그 맛이지." 드라마 목소리보다 더욱 허스키한 음색에 강한 힘을 싣고 말을 이어간다. "배우가 극중 리얼리티에 생명력을 주려면 자신이 갖고 있는 재료에 극중 인물을 넣고서 새로움을 만들어야 해."

그는 올해로 '연기 인생 50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배우가 출연한 수많은 작품을 수십년간 가슴에 묻고 기억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는 1982년에 대원군 일대기를 그린 사극 '풍운'의 이야기를 꺼낸다.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대원군이야. 실제 대원군 이미지는 나와 전혀 맞지가 않거던. 실제 인물은 풍채가 크고 강인해 보이는데, 거기에 비하면 난 좀 왜소해 보이잖아. 대원군의 고뇌하고 좌절하는 인생의 욕망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잖아. 난 대본을 받는 순간부터 내가 갖고 있는 배우로서 재료에다가 새로운 대원군을 나한테 넣어버렸지." 그가 출연한 보통사람들, 눈이 내리네, 보고 또 보고, 허준, 상도, 목욕탕 집 남자들, 내 사랑 누굴까. 사랑이 뭐길래 등의 드라마에서 세상에 내놓은 등장인물들은 늘 새로움을 담아내려는 강한 의지가 담긴 흔적들이다.

김수현 작가와의 특별한 인연에 대해 물었다. "김수현 작가의 대사는 부호 하나 버릴 게 없어요. 그만큼 배우가 말을 하기에 가장 좋은 언어로 표현돼 있지. 당연히 말을 못하는 배우는 그 분 작품에 출연했다가는 엉망이 될 수도 있고 말야." 그러면서 배우는 대사 구사능력이 중요하다고 말을 이어간다. "말의 고저를 제대로 알고 표현해내는 배우 지망생들이 드물어. 배우는 표준어를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해낼 수 있는지가 중요한데 그 훈련들이 잘 안 돼 있어." 그는 세종대 영화예술학과에 석좌교수다.

고교 연극반 시절부터 연극의 맛을 알게 돼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하자마자 여러 동기들과 서울대 연극반을 만들고 평생을 배우로 살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실험적인 연극이 많지 않을 때였어. 연극이 좋아서 뭉친 사람들과 밤새도록 토론하고 새로운 연극도 만들고 다양한 연기훈련 방법들도 고안해냈지." 그는 1962년 KBS 개국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 출연하면서 방송과 인연을 맺어 평생토록 바쁜 배우로 살아가고 있다. "방송을 시작하면서 바빠서 자주 연극을 하지는 못했지만 연극은 나에게 많은 것을 줬어. 1979년에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 로만 역을 맡아 국립극장에서 공연했는데, 그 작품을 아직도 잊지 못해. 20년이 지난 후에 그 역을 다시 맡고 공연했는데 전혀 새로운 느낌을 주더라고. 아마 그게 무대에 서게 만드는 이유인거 같아."

그는 1992년 제 14대 민자당(민주자유당) 국회의원에 당선돼 이듬해 부대변인까지 지낸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정치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요즘에는 우리문화를 대변하는 정치인들이 많지 않아 아쉬워. 국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것은 문화뿐인데, 정치는 문화마인드가 없으면 설득력을 잃을 수 밖에 없어. 문화를 진정 이해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커요."

늘 새로움을 담아내려는 그는 수많은 시청자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배우이자, 배우를 넘어서고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아버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대경대학 연예매니지먼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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