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예술을 낳는다] ④소설가 이문열

입력 2007-03-02 07:33:16

"애비는 남로당…" 늘 아버지 그늘에 살아

분단은 상처의 제조 공장이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내상을 입혔다. 이데올로기로 인한 가족의 해체와 그에 따르는 고통은 마치 짐승 잡는 올무 같은 것이었다. 몸부림을 쳐도 제 힘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불가항력, 그것이다.

'애비는 남로당이었다.' 이 시대의 대표작가 이문열(59). 그는 분단이라는 처절한 상처의 붕대를 감고 살아왔다. 아버지의 따스한 손길이나 눈길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아버지의 어두운 '그늘'만 어깨 짐 지고 살아왔다. 그의 상처는 사회주의자 아버지가 준 '그늘'이었다.

잔설이 녹지 않은 경기도 이천의 부악문원. 서재의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 따스했다. "랭보의 말대로 상처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나이 60줄에 상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네." 예순을 앞둔 그에게 이제 '그늘'마저 산화된 느낌이다.

그의 아버지 이원철(李元喆)은 월북한 지식인이다.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로 서울 휘문고보 졸업 후 일본 유학시절 좌익에 경도됐다. 해방이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박헌영·이현상 같은 남로당 인사들이 그의 집에 드나들 정도였다.

6.25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수원농대 책임자를 맡았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는 인민군과 함께 월북했다. 당시 서른셋의 어머니는 만삭이었고, 이문열은 두 살이었다. 아버지가 월북하자 외가인 경북 영천에 잠시 머물다가 1951년 조상 대대로 고향인 경북 영양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후 남은 5남매와 어머니의 삶은 그야 말로 상처투성이였다.

'월북자 가족'이란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이문열과 여동생은 보육원에 맡겨지기도 했다. "그걸 알고 싶었어. 온 가족을 흙구덩이에 던져놓고 떠나야 했던 그 이유를..." 작가는 10대에 공산주의의 원형을 알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금서. "비판서의 역주를 통해 사상을 가늠하기도 하고, 역사서를 훑어보며 사상적으로 재구성해보기도 했지."

연좌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요시찰 인물로 분류돼 하는 일마다 형사들이 와서 들쑤셔 놓았다. "가정교사 하는데 형사가 들락거리면 좋아할 학부모가 어디 있겠어." 직장도 오래 다니지를 못했다. 서울대 사범대를 다녔지만, 그에게 교사의 길은 요원한 것이었다.

197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자레를 아십니까'로 등단하고, 매일신문사에 입사했다. "이제 노하우가 생기더라고. 틀림없이 대공과 형사가 신문사에 찾아와 동태를 조사할 것 같아 아예 쳐들어갔지." 담당 형사를 만나 "내 동태를 내가 미리 보고하겠다."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버지의 부재는 가족들에게 끊임없는 재난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이 값이 저쪽에서는 제값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남쪽 가족이 고통 받는 대신 아버지는 북쪽에서 이상을 펼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양반도 똑 같이 죽을 지경이라..."

일본에서 유학까지 한 농업경제학자인 아버지는 1954년 북한 함경도 종성의 한 협동농장의 평 농장원이었다. "아오지 탄광의 광부와 똑 같아." 15년 뼈 빠지게 고생해서 농업지도원으로 승격돼 내려온 곳이 경성. "다시 15년을 더 고생했는데 청진까지도 못 오고 어랑군이라는 곳에서 정착했어요."

더 환장할 노릇은 북쪽의 가족도 똑같이 고통을 받은 것이다. 아버지는 북쪽에서 재혼해 5남매를 두었다. "남쪽에서 온 아버지 성분 때문에 대학입학 허가가 안 나왔어요." 17세에 군대 입대해 서른이 돼서야 겨우 당성을 인정받아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젊은 아내와 가족을 버리고, 또 많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찾아간 북한의 인민공화국. "역연좌제를 그곳은 그곳대로 치렀지. 내가 당하는 것 보다 더 화가 났어. 억울해. 이건 용서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 이문열이 보수논객을 '선언'하게 된 계기다. "이데올로기를 떠나 인간적으로 용서가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어렵게 연락이 닿아 1999년 아버지를 만나러 갔지만, 결국 죽음만 확인하고 두만강변에서 망제를 지내면서 이문열은 통한의 눈물을 쏟아냈다. 그의 가족사는 분단이 낳은 비극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상처는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 대표작이 대하소설 '변경'이다. 공산주의자로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를 둔 4남매와 어머니의 인생역정을 다루고 있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이리저리 떠돌고, 결국 고아원까지 가는 주인공은 바로 작가의 삶이 투영된 것이다.

중편 '아우와의 만남' 속에는 북한의 이복 아우와 화해하고 망제를 지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고, 대표작 '영웅시대'도 6.25를 전후한 민족의 격동기에 이념으로 인해 고통 받는 지식인과 그의 가족들이 겪어가는 시련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어릴 적 아버지는 원망의 대상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통과의례의 성장통(痛)인 '부성살해'(오디푸스적인 아버지 부정)마저 힘겹게 만들었다. 원망과 그리움, 그리고 안타까움의 대상이 된 아버지의 삶은 통한의 눈물로도 씻을 수 없는 비극의 원형이다.

그러나 이문열은 "나의 상처는 매일신문사에 입사해 형사를 찾아갈 때 이미 극복된 것"이라고 했다. 또 "불행은 긴장이면서 한편으로 감정과 경험의 폭을 넓혀주는 계기"라고 말했다. 이 상처가 없었다면 이문열은 어떤 인물이 됐을까. 아마 한국은 걸출한 한 작가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1948년 서울 출생. 경북 영양 등에서 성장. 서울대 국어교육과 중퇴, 197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나자레를 아십니까'로 등단. 소설집 '사람의 아들'(1979), '젊은 날의 초상'(1982). 장편 '영웅시대'(1984),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8). 대하소설 '변경'(1998) 등. 94년~97년 세종대 국문과 교수. 현재 부악문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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