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바다,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야. 잠시 두 눈을 감고 들어봐. 푸른 바다 포말 돼서 부서지는 파도랑, 바람과 공기가 만나 뺨 옆을 휘젓는 바람소리도…."
설연휴가 시작되기 직전인 지난 16일 오후 김경숙(39·여·부산시) 씨는 불현듯 '간절곶'으로 차를 몰았다. 동해바다로 향해 열린 간절곶에서 바람을 맞다가 망부석처럼 우뚝, 바다를 등지고 서있는 거대한 우체통을 발견했다. 그자리에서 그녀는 그리운 친구에게 한 장의 엽서를 띄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간절하게 그립거나 사무칠 때는 '간절곶'에 가서 편지를 쓰세요.'
울산에서 바닷가를 따라 남쪽으로 20㎞ 정도 내려가면 동해쪽으로 불룩 튀어나온 '간절곶'에 닿는다. 이곳에는 마음을 눌러담은 편지를 무료로 배달해주는 '소망우체통'이 있다. 수취인의 주소를 모르거나, 하늘나라로 먼저 간 사람일지라도, 혹은 안부를 묻고 건강을 기원하는 엽서일지라도 소망우체통은 반드시 수취인을 찾아 배달해준다. 우체통 안에는 수십 년 동안 가슴 속에 꾹꾹 간직해 온 간절한 사연들이 가득 담겨 있다.
"하늘나라에 계신 울 엄마, 보고싶어요. 사랑해요…. 하느님 이 편지 엄마에게 제발 부쳐주세요."
"보고싶은 병안 엄마. 당신이 떠난 지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신의 뒷자락에 매달려 지금까지 허우적대며 당신과 아들을 생각합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과 아들의 깨끗하고 해맑은 모습을…. 당신을 지금도 사랑합니다. 눈물이 나도록 당신과 아들이 그리워지는 올해 떠오르는 해를 보며….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한 나는 껍데기만 남아 아직도 흔들립니다. 하늘에 있는 당신 잘 있으시고 도와주세요."
"엄마, 설에도 울산에서 일한다고 내려가서 하루 만에 덜렁 내려와서 엄마 걱정만 시키고 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이렇게 작은 편지 하나 보냅니다. 울산에는 일하는데서도 형부네에서도 돈을 많이 받고 잘 있어요. 혼자 산다고 밥 거르지 마시고 아침 꼭 잘 챙겨드세요. 작은 딸 송희가."
말로 하기가 어려웠던 가슴 속 이야기들은 편지로 쓰는 게 좋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글씨 속에 당신의 마음이 담긴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조차 쑥스러워하던 경상도 사람들의 '허허로움'도 엽서에 담으면 예쁜 연애편지로 변한다.
"자기야. 여기 간절곶이야. 바다가 너무 예쁘고 시원하다. 그동안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했던 것이 모두 다 당신 덕분이야. 고마워. 항상 그 자리에서 우리를 사랑해줘. 사랑하는 아내가."
우체통 속으로 들어갔다. 마침 왼손으로 엽서를 가린 채 남자친구에게 보내는 엽서를 쓰던 김정현(26·서일대 2년) 씨를 만났다. 그녀는 부끄러운지 엽서를 보여주지 않는다. 행여 사랑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리라. "다 잘됐으면 좋겠어요." 우체통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빠, 엄마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엽서를 보내는 것이 처음"이라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쓴 정성을 안다면 감동해야겠죠."라고 말했다.
간절곶에서는 편지 쓰는 기쁨을 기억해낼 수 있다. 편지를 쓰고 기다리는 시간이 생략되면서 우린 한동안 편지를 잊어버렸다. 그 많던 우체통도 사라지고 있다. 우표는 골동품처럼 수집가들만 찾는다.
간절곶 소망우체통에는 요즘 하루 평균 70여 통의 엽서가 쌓인다. 가슴 속 간절한 사연보다는 바다와 등대와 우체통이 있는 풍경에 취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긴 간절곶은 호미곶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다. 바다에서 보면 긴 간짓대(장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간절곶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간절곶은 누군가를 기다리다 그대로 돌이 돼 버린 망부석이 있음직한 곳이다. 소망우체통은 그래서 생겼다. 일본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 박제상을 기다리다 그대로 망부석이 돼 버린 부인의 전설이 있는 치술령도 그리 멀지 않다.
관리를 맡고 있는 남울산우체국의 김대우 지원과장은 "편지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간절곶 소망우체통은 잃어버린 사랑의 기억을 일깨워주는 진정한 '소망우체통'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 간절곶 소망우체통은
간절곶 소망우체통은 높이 5m, 가로 세로 각각 2.4m로 세계 최대규모다. 제작비만 3천만 원이 들었다.지난 연말 해맞이행사를 위해 기획 제작됐다. 울산광역시와 울산MBC가 제작비용을 부담했고 관리는 남울산 우체국이 맡고 있다.
매일 한 차례씩 우편물을 수집하고 있다고 한다. 남울산우체국에서는 우체통안에 엽서를 비치해두고 이 엽서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새해 해맞이 행사 때는 하루 7천여 장의 엽서가 쌓이기도 했다. 무료라는 말에 간혹 우표를 붙이지않은 대량 우편물을 가져와서 부치는 경우도 있다.
소망우체통이 인기를 끌자 남울산우체국에서는 올 봄이나 가을쯤 전국편지쓰기대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이메일과 문자메시지가 편지를 대체해버린 요즘, 편지가 전해주는 따뜻함과 옛추억을 되살리겠다는 취지다. 특히 청소년들이 편지를 쓰면 글쓰기실력도 부쩍 늘어날 수 있다고 한다.
울산광역시에서는 이 우체통을 세계기네스북에 올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바다가 아름다운 이곳에는 우체통 외에 등대도 볼만하다. 1930년에 세워진 간절곶 등대는 이후 개보수작업을 거쳐 17m 높이로 우뚝 서있다. 등대에서의 추억을 원한다면 등대관사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다.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예약하면 된다.
글·사진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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