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이즈음은 참으로 추웠다. 그해 2월18일 대구지하철참사가 터진 뒤의 날들이 그랬다. 적어도 필자의 기억엔 그렇게 새겨져 있다. 날씨 자체가 그랬던지, 밤이면 냉골이 돼 버리던 작업실 탓인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그 많은 寃魂(원혼)들의 울부짖음 때문이었을까, 혹은 내 마음이 얼어버려 그랬던 것일까. 어쨌든 또렷하게 기억되는 것은 오직 온몸을 얼리던 그 음산한 寒氣(한기)뿐이다.
그날 이후의 매일은 거의 비슷한 사이클로 반복됐다. 오후 10시쯤 마지막 점검 대화가 끝나면 기자들은 흩어져 밖으로 나갔다. 매일신문 편집국에 대개 혼자 남겨지던 사건 담당 部長(부장)이 할 일은 다음날字(자) 신문 제작 준비였다. 매일 철야로 장장 10시간 가까이 계속되며 필자의 진액을 소진시켰던 그 작업. 엄청난 분량의 기사들을 조정하고 손질하느라 다음날 오전 8시나 돼야 허리를 펼 수 있곤 했다.
감당하기 힘든 과로. 체력이 먼저 한계에 이르더니 다음엔 정신이 昏 (혼몽)해졌다. 그걸 다잡겠다고 니코틴 함량이 7.5㎎이나 된다는 독한 담배를 줄로 빨아댔으나 수렁은 더 깊어져만 갔다.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기력은 탈진돼버린 한밤중의 孤立無援(고립무원). 그 절망감 무력감이 더러더러 통곡으로 터져 솟구치려 하던 어느 날 밤, 정말로 괴기한 흐느낌이 적막을 꿰뚫고 흘렀다. 순식간에 온몸이 얼어붙고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보니, 그건 저 건너 어둠 속의 책상에 엎드려 잠깐 눈을 붙이던 한 젊은 기자가 내는 呻吟(신음) 소리. 그래, 나보다도 자네들이 더 힘들 테지….
이런 생활이 참으로 오래 계속됐다. 기억으로만 본다면 두어 달은 됐을 성싶기까지 하다. 하지만 힘들어도 잔꾀를 부리거나 安逸(안일)을 택할 수는 없었다. 왜? 우선은 직업적 의무감이 컸던 탓이겠지만, 그 무고하고 숱한 희생에 그렇게 해서라도 예를 차려야 덜어질 것 같은 인간적인 채무의식 또한 결코 작지 않았다. 존재는 있는데 찾는 이가 없어 결국 신원마저 밝혀지지 못하게 된 시신들을 보고는 더욱 그랬다. 외국 정치 용어를 견강부회해 '잊힌 사람들(forgotten men)'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주던 우리의 마음자리는 인간 존재의 심연을 보는 듯 그 망자들과 共鳴(공명)하기도 했다.
참사 收拾(수습)이 그렁저렁 응급 수준을 넘어설 즈음 채무의식은 점차 '그 엄청난 희생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깨우침으로 형태를 이뤄 갔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남은 자들을 지켜주는 그 무엇으로 부활토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하리라는 믿음이 자라났다. 그 恨(한)들이 그냥 날려가 버리도록 놔두는 건 亡者(망자)들을 배신하는 짓이다, 또 하나의 봉오리로 되살리는 게 우리가 할 일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들의 희생을 기리고 안전의 가치를 일깨울 시설을 만들 의무가 살아 있는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그 희생이 부활할 수 있도록 앞소리를 먹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잠깐인 줄 알았더니 그 사이 4년이 지나가 버렸다. 맡은 일이 바뀐 후, 참사 마무리는 잘돼 가려니 생각하고 지냈다. 하지만 근래 들으니 그게 아니라 했다. 안전재단 설립은 지지부진하고, 안전파크는 진작 샛길로 빠진 듯하다고 했다. 그 커다란 희생을 그냥 덮어버리는 수준에서 뒤처리가 종료돼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었다. 정말 그렇다면 취재라는 이름의 일로 그날의 현장에 目擊者(목격자) 되고 當事者(당사자)가 됐던 필자에게도 너무나 죄스런 일이다.
오는 일요일이면 그리도 한 많았던 지하철참사 네 돌이다. 그날은 마침 설날. 유족들은 또 한번 아픈 가슴을 꾹꾹 눌러두려 먼 하늘이나 올려다 볼 터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많은 희생을 그냥 날려버린 채 아무것도 거두지 못한 빈손으로 서 있는지 모른다. 죽어 가던 이들이 남긴 그날의 마지막 절규라도 다시 읽어야 할까 보다.
朴鍾奉 논설위원 paxkore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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