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재는 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다. 이를 알면서도 사람들은 시간을 잰다. 낭비를 막자는 의도다. 심한 사람들은 시간을 잘디잘게 쪼갤 대로 쪼개가며 산다. 그렇다고 낭비가 없을 수 있을까. 없다. 사무엘 존슨의 말대로 짧은 인생은 시간의 낭비에 의해 더 짧아질 뿐이다.
남은 시간이 1년 정도면 무슨 일이든 조급해 질 수밖에 없다. 수십 년 몸담았던 직장에서 정년을 1년 남짓 남겨 둔 월급쟁이는 그 착잡한 마음이야 달리 표현이 쉽지 않다. 아직은 정년이 1년이나 남았다고 좀 허풍스런 월급쟁이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남은 1년에 조바심과 안달이 정상이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시간은 아무리 절약해 가며 이리저리 쪼개고 재본들 이미 쏘아버린 화살이질 않은가.
노무현 대통령은 그러나 갈수록 여유가 있어 보인다. 여느 월급쟁이처럼 대통령도 월급을 받는다. 월급쟁이들이 정년이 1년이 남았건 어떻건 간에 어떻게든 정년을 채우려 몸부림치는데 노 대통령은 그렇지 않다. 이를 보면 틀림없이 보통 사람이 아니다.
솔직히 수십 년 끝에 이른 정년에 한 해밖에 남지 않아 조바심내는 옹색한 월급쟁이와 임기 5년의 대통령직에 남은 1년 남짓과 비교한다는 것은 좀 뭣하다. 그러나 '남은 1년'에는 대통령이든 우리 같은 장삼이사든 별반 차이가 있을까. 그렇지만 노 대통령은 "임기를 다 마치지 않은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은근히 국민들의 속을 찔러 보았다. 하야하겠다는 의지가 강력히 담긴 것인지 하야하지 않도록 이제 그만 알아서들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여유를 보인 것인지 헤아리기 힘들다. 이렇게 국민들의 속내를 찌른 엊그제부터 날씨는 조금씩 추워졌다.
과연 여유일까. 이를 쪼개고 쪼개가며 분석하는 전문가들보다 대다수 국민들은 어딘가 불안하다. 까놓고 말하면 불쾌한 불안이다. 당장 바닥만 기는 경기가 회복될 조짐은커녕 대통령의 한 말씀이 되레 불쏘시개 역할이다. 부동산이 어디로 튈까도 걱정이고 베이징이 저렇게 분답스러워도 들리는 소리는 종전과 다를 게 없다. 거리에는 농민'노동자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는 가운데 당적도 홀랑 벗겠다니. 겨울이 방금 시작됐는데도 말이다.
애지중지했던 사람의 헌법재판소장 임명 동의안을 철회해서 순간적으로 비롯된 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사안이 엄청나다. 벌써 몇 번째인가. 위기 때마다 그랬다면 이건 습관성인가. 대통령 자신에 대한 비판과 끌어내리기 음모로 그러했다고 생각한다면 국민들은 이번 대통령의 '임기 발언'을 대통령의 국민에 대한 음모로 여길 수밖에 없다. 만약 정년 1년 안팎을 남긴 월급쟁이가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면 그 회사의 직원들이 불안해할까. 피식 웃을 일이다.
이를 코드와 오기라고 했다. 나라의 골격에 엄청 중요한 헌번재판소마저 뒤숭숭할 정도다. 그러니 나라의 골수인들 어찌 온전타 할 것인가. 한때 탄핵으로 야단법석을 떨었던 야당은 오히려 하야는커녕 남은 1년을 더 잘 견디며 지내라고 격려한다. 어딘가 잘못돼 있어도 단단히 잘못돼 있다. 어디가 잘못된 것인가. 모든 것을 잇속으로만 계산하고 모든 것을 경쟁 속에서만 해결하려 드는 습성 때문이다.
어떤 물질의 가공과 그 생산자가 조작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가치를 설정하지 말아야 한다.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오로지 그 화살이 사람을 상하지 않게 할까 두려워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그 갑옷이 그저 사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해야 하는 관계. 자기부정을 사심 없이, 욕심 없이 해야 하는 관계. 병을 고치려는 무당과 관 만드는 목수의 관계를 생각하고 이해할 줄 아는 일은 비단 맹자의 시대에만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에서는 화살과 갑옷이 나란히 팔려나가고 이웃의 우물에서는 무당과 목수가 함께 물을 긷는 시대. 그런 시대가 진정한 우리의 시대 아닌가.
노 대통령은 1년 후면 봉화마을이 기다린다. 하나 그곳에는 화살과 갑옷이 없다. 정년 1년을 남긴 평범한 월급쟁이는 정년 후 어느 마을로 가야할까. 망설일 것 없다. 무당과 목수가 함께 물을 긷는 우물 있는 곳으로 가면 될 것을!
김채한 논설위원 namu@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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