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70년대 金一(김일)의 박치기 한방은 국민들에게 통쾌한 선물이었다. 흑백 텔레비전도 드물었던 시대, 프로레슬링이 열리면 라디오 앞에 동네 사람 모여 앉아 아나운서의 열띤 중계에 빠져들었다. 씨름판을 누볐던 청년 김일은 재일교포 力道山(역도산)의 이야기를 듣고 프로레슬러의 꿈을 키웠다. 배곯아 죽느니 가다가 죽더라도 일본에 건너가야겠다는 사람들이 남해안으로 은밀히 몰리던 밀항의 시대, 1956년 김일도 그 길을 택했다.
○…역도산을 만나 1958년 오오키 긴타로(大金太郞)라는 이름으로 일본 프로레슬링 무대에 선 김일은 안토니오 이노키'자이언트 바바와 함께 역도산 문하 3인방으로 일본 프로레슬링의 황금기를 일궜다. 그리고 1963년 12월 미국 원정에서 WWA 챔피언에 오른다. 그러나 그날 역도산이 도쿄 아카사카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야쿠자의 칼에 피살됐다. 그후 김일은 귀국했다.
○…당시 국내에선 백드롭의 명수 장영철이 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선진 유학파 김일 앞에 장영철은 왜소했다. 1965년 11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국제레슬링대회. 일본의 오쿠마와 맞붙은 장영철은 집중적인 허리 공격을 당해 비명을 지르고 降伏(항복)을 표시했으나 오쿠마가 계속 공격을 가하자 흥분한 장영철의 후배들이 링에 뛰어올라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때 장영철은 "프로레슬링은 쇼다"라고 소리쳤다.
○…이때부터 한국의 프로레슬링은 쇠락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그 사건 이후 70년대까지 프로레슬링은 여전히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호랑이와 곰방대가 그려진 비단 가운을 입고 링에 오른 김일의 카리스마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결국 한국의 프로레슬링은 김일밖에 없었고 김일이 노쇠하면서 衰落(쇠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김일은 지난 2월 와병중인 장영철을 찾아가 41년 만에 화해했다. 장영철이 지난 8월 작고하자 아픈 몸을 이끌고 弔問(조문)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연초에 스승 역도산의 묘지도 참배했다. 역도산은 차가운 성격 탓에 사후 그를 좇는 후배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생전에 할 수 있는 해한들을 그렇게 하고 김일은 별세했다. 고향 전남 고흥 외딴 섬에 전기를 넣어주는 등 적극 후원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지난 10월 26일 개발의 시대를 풍미했던 또 한 사람의 영웅이 갔다.
김재열 논설위원 soland@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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