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미란다 프리슬리는 자신의 해고를 감지한 순간 秘器(비기)를 빼든다. 앙숙인 자클린을 편집장으로 앉히려는 음모를 눈치 챈 미란다는 회장과 독대, 자신이 키운 수많은 디자이너와 모델들의 리스트를 들이밀어 상황을 역전시킨다. 희뜩번뜩한 패션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터득한 법칙은 상대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카리스마와 탁월한 일 처리 능력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쟁자를 밟고 일어서는 생존본능 즉 '힘'이었다. 미란다에게 그 힘은 자기 미래를 결정짓는 불가결한 선택인 동시에 자기 존재감에 대한 치열한 욕망의 결과다.
힘의 논리에다 정확한 상황판단을 토대로 미래를 예측해내는 통찰력이 가미될 때 더욱 빛을 발한다는 점을 동서고금의 역사는 가르쳐준다. 19세기 후반 일본 조슈(長州'현 야마구치현)번은 미'영'불'화란 등 4대 열강과 막부의 위협에도 통찰력으로 역사의 물꼬를 자기편으로 되돌려낸 좋은 사례다. 당시 조슈번은 막부에 저항하는 討幕(토막'막부토벌)의 목소리가 대세였다. 하지만 1864년 서양 열강과의 1차 시모노세키 전쟁과 막부의 정벌에 무참히 패배한 조슈번은 정책의 방향을 틀었다. 외세와 막부의 힘을 확인한 조슈번은 '武備恭順(무비공순)'의 구호 아래 내실을 다졌다. 메이지(明治)유신의 최대 추진력이 된 조슈의 힘은 여기서 비롯됐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에게 정치적 DNA가 이어졌다는 다카스기 신사쿠(高衫晉作). 조슈번 존왕양이파의 핵심인물이었던 그는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의 비밀회담을 통해 삿초(薩長)동맹을 맺었다. 동맹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쓰마번의 형편을 간파한 것이다. 조슈는 열강들의 밀무역 금지를 뚫고 사쓰마번을 활용해 영국 무기상으로부터 7천 정의 소총과 군함 등을 사들여 군비를 확충했다. 이들 신무기는 1866년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이끄는 15만 막부군 격파에 크게 공헌했고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토대였다.
선거라는 절차로 판가름나는 정치시스템에서는 數(수)의 논리가 통하지만 그런 절차가 없는 국제사회에는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 자기 이익과 직결된다면 그 어떤 비열한 타협도 마다하지 않는 게 생리다. 미란다의 법칙처럼 말이다. 북핵이라는 위기 상황과 미'일'중'러 등 주변 강대국들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유리한 계산을 이끌어낼 만한 리스트가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다. 고이즈미(小泉)의 일본이 '부시의 푸들'을 자청한 사이 한'미 동맹은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가진 힘도 사분오열 찢어놓은 이념 갈등과 분열이 한반도의 미래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갈지, 어떤 부메랑으로 되돌아올지 모를 일이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그동안 유지되어온 남과 북의 군사적 균형은 일거에 사라졌다. 우리의 재래식 전력과 전쟁지속 능력에서 북한보다 우위라는 것이 이제까지의 평가였지만 북핵으로 우위 주장 자체가 무의미하게 된 것이다. 국민의 정부 이후 한반도 긴장 완화를 명분으로 선택한 햇볕정책에 경도된 나머지 國益(국익)에는 엄밀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화 추세에서 '인터내셔널'이라는 전체적인 틀을 깨지 않으면서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는 세련된 외교야말로 힘의 바탕이 아닌가. 民族自決(민족자결)도 큰 힘이 될지 모르겠으나 有備(유비)의 결단 없이는 100년 전 침탈의 역사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고, 자칫 한반도의 운명은 북핵에 좌지우지될지도 모른다.
미란다는 앤드리아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속절없이 밀려나거나 현실을 포기하기보다 치열한 생존을 택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 앞에서 변명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의 절대권위는 실력에서 출발해 빠른 상황판단과 통찰력이 세워 올린 철옹성 같은 미래로 완성되고 있다. 우리의 역사와 현재, 미래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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