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가 파헤친 조선 왕릉의 비밀 1·2

입력 2006-10-28 16:43:49

한성희 지음/솔지미디어 펴냄

왕릉사이를 거닐다 보면 마치 수수께끼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둥글게 솟아 있는 그 왕릉은 숱한 영욕과 비밀을 간직한 채 나지막이 엎드려 수백 년 후의 우리에게 무언가 이야기하는 듯 하다.

문화재청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예비등록을 하고 2007년에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조선왕릉은 남북한 모두 42개. 이 책은 조선 왕릉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비사 등 왕릉이 들려주는 얘기를 조곤조곤 풀어내고 있다.

우선 우리가 궁금해하는 왕의 장례 절차에 대해 소개한다. 조선시대 왕의 장례는 5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풍수 때문에 왕이나 왕비의 시신이 땅에 닿기 전에 썩으면 절대 안 된다. 그렇다면 한여름에 죽은 왕과 왕비의 시신을 어떻게 지켜냈을까? 부패 방지를 위해 얼음으로 빙반(氷盤)을 만든다고 한다. 냉동 영안실 위에 대나무로 만든 평상을 만들고, 습기를 흡수하기 위해 마른 미역을 사방에 쌓아놓고 계속 갈아댄다. 이것을 '국장미역'이라고 한다. 시신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 비장하기조차 하다. 또 삼베 수의 대신 왕과 왕비의 습에는 흰 비단 옷 9겹에 겹옷, 겹이불 등 무려 90겹의 수의를 입힌다고 하니, 실로 어마어마하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조선시대에는 무덤을 깊이 팠다가는 무시무시한 '왕위찬탈 음모'죄로 중죄인이 된다. 왕실풍수에서 왕기를 받는 깊이가 10자(3m)인데, 당시에는 이 사실조차 극비였다고 한다. 일반 백성들이 왕기를 가로챌까봐서다. 조선왕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왕기가 있을만한 전국의 명당을 골라 절을 짓고 탑과 당간지주를 세워 지기를 눌러버렸다. 풍수에 대한 조선왕조의 신봉이 신경질적일 만큼 강했던 것 같다.

왕릉은 주인공의 삶에 따라 따습게도 다가오고, 신산스럽기도 하다. 비운의 단종 비, 정순왕후(1440~1521)는 17세 단종과 애끊는 이별을 하고 지금의 숭인동 동망봉 기슭에 초가삼간을 짓고 산다. 끼니조차 잇지 못하는 왕비의 심정을 헤아려준 사람은 바로 동네 여인들. 여인들이 식량을 가져다준다는 소식에 세조가 이를 금하자, 여인들은 최초의 금남(禁男) 시장인 채소시장을 열었다. 여인들의 지혜로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통곡하며 세월을 보냈다. 정순왕후의 능침 앞에는 지금도 물이 솟아 나와 물줄기를 돌리려 만든 수로까지 있다. 18세 어린 나이에 청상이 되어 자손도 없이 홀로 지낸 송비의 눈물이 아닌지.

그 외에도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최고 명당자리로 옮기고 할아버지 영조를 백성도 꺼리는 파묘 자리에 묻어버린 일 등 왕릉에 관한 에피소드도 실려있다.

저자는 재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유적지인 능 근처마다 왜 숯불갈비집이 많은 걸까? 이것은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농경사회인 조선시대엔 고기를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왕릉은 제례를 위해 소를 자유롭게 잡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소갈비 요리가 발달됐다고 한다. 홍릉근처에서 홍릉갈비가, 태릉 부근에서 태릉갈비, 수원 화성 융건릉에서 수원갈비가 탄생했다는 것. 제례를 준비하는 요리사들이 왕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니 왕실 요리법이 흘러나오게 된 것이 지금의 숯불갈비 요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왕릉마다 얽혀있는 역사적 사실과 풍수, 현대적 사실까지 구성지게 풀어놓는다. 왕릉 답사 지침서로도 손색이 없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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