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리결의, 北 '고난의 행군' 재연될까?

입력 2006-10-15 17:02:01

유엔 안보리가 14일(현지시간) 유엔 헌장 7장을 적용한 대북 제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함으로써 북한은 정권 수립 이후 또 한 번 최대의 시련을 맞게 됐다.

벌써 일각에서는 북한이 제2의 '고난의 행군'을 선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북한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6.25전쟁을 제외하고는 수백만 명의 아사자를 창출한 1995-98년으로 , 북한당국은 당시를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 당시 심각한 경제난은 체제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는 국제사회의 관측과 우려를 불러오기도 했지만 북한은 체제를 굳건히 지켜냈다.

더욱이 10년 전 당시 북한이 처했던 국내외적 환경은 핵실험으로 인해 국제사회의 고립과 제재에 직면한 현재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정치권력 공백 없어..공고한 지배체제 구축= 90년대 중반에는 북한 정권을 세운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주석직과 노동당 총비서 자리가 비어있는 등 완전한 국가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물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권력을 장악한 상황이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권력의 공백상태가 한동안 지속됐다.

당시 김 위원장은 김 주석에 대한 효성심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최악의 빈곤과 이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된 환경에서 정치적 권력을 물려받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예상되며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이른바 '유훈통치'를 실시했다.

그러나 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를 통해 공식 출범한 김정일 체제는 헌법 개정을 통해 국방위원회를 최고의 국가정책결정 기구로 개편하고 김정일은 국방위원장 및 노동당 총비서를 겸임하는 등 정상적인 국가시스템을 갖췄으며 이후 수년간 정치적 안정을 이뤄냈다.

또 중국 및 러시아가 대북 유엔결의안에 찬성했지만 10년 전에도 북한은 이들 국가와 불편한 상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북한과 중국은 1992년 8월 중국이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소원해졌다가 1999년과 2000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잇달아 방문하면서 관계를 회복했다.

소련 해체 이후 줄곧 소원했던 북.러관계도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정상관계로 복귀했다.

◆7.1조치 등으로 생산.교역시스템 갖춰=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은 동구권 붕괴에 이어 김 주석의 사망, 사상 최대의 자연재해까지 입으면서 기존의 내부 산업 및 대외무역 체계는 거의 붕괴된거나 다름 없었다.

당시 북한의 주요 교역국은 일본 정도였고 특히 중국과 남한의 대북교역과 지원은 적은 규모에 그쳤다.

또 세계식량계획 등 국제사회의 식량지원은 아사자 급증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90년대 말부터 비로소 본격화됐다.

하지만 현재는 중국과 남한이 제1, 2의 교역국으로 부상했고 유엔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민간기업을 중심으로 한 교역과 지원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북.중 경제협력.교류도 종전과는 다른 상황이다.

과거에는 중국의 무상지원에 기반했던 양국 간 경제협력은 서해안 유전의 공업 개발, 중국 민간 기업의 북한광산 개발 등 단순한 지원국이 아닌 전략적 경제 파트너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

유엔 결의안으로 대북제재가 가해져도 민간기업의 교역까지는 막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지적이다.

아울러 사회주의국가와 교역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90년대 중반과 달리 2002년 7.1경제관리개선 조치 이후 기관.기업소.공장 등 단위별로 외국 기업과 교역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국가가 전담했던 무역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에 부합되는 시스템으로 전환함으로써 국가간 교역은 줄어들 수 있어도 민간기업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교역의 틀은 갖춰져 있어 필요한 최소한의 교역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제재조치로 북한 경제가 일정한 타격을 입는 것이 불가피한 가운데 90년대 중반처럼 어려운 상황을 맞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사회적으로 '고난'에 내성 생겨=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는 수십 년 동안 국가배급에만 의존하던 무방비 상태의 주민들을 혼란 속에 빠뜨렸다.

국가의 식량.생필품 공급이 끊어졌으나 여전히 많은 주민이 국가만 바라보면서 스스로 생존에 나서지 않았다.

이 때문에 노동당에 충실했던 하급 관리와 교사, 노동당원이나 성분 좋은 하층 주민이 가장 많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망자 수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인민보안성에서 비공개로 집계한 사망자는 무려 400만 명이라는 주장도 전해지고 있다.

불법이든 도둑질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해 생존을 보존했던 사람들만 살아남은 셈이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이들의 끈질긴 자생력은 이번 유엔의 경제제재를 이겨내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한 탈북자는 "유엔의 대북제재가 시작된다고 해도 90년대 최악의 식량난 속에서 살아남은 북한 주민들은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라며 "무서운 생존력으로 버텨낼 것"이라고 말했다.

◆자체 생산력 증가 = 90년대 중반에는 사상 최대의 자연재해로 북한의 식량생산은 최소 필요량 중 300만t이 부족한 340만t에 머물렀고 공장.기업소는 거의 숨을 멈춘 상태로 국가적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들어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과 경제교류 확대로 숨죽였던 공장.기업소는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당국은 국가적으로 거액을 투자해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의 기술과 시설로 닭공장.식품공장.의류공장 등 경공업분야 공장을 대대적으로 건설.개선했고 국가적으로 주요한 공장.기업소를 현대적으로 개선하는데 주력해 나름대로 경제적 토대를 쌓았다.

특히 협동농장에 가족형태의 분조제를 도입하고 '밥 먹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농사를 지어야 한다'며 국가 차원의 총동원령을 통해 최근 쌀 생산은 당시의 1.5배에 달할 정도다.

아직은 절대적인 식량분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지난해 북한의 곡물생산량은 480만t으로 1990년대 이래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돼 당분간은 90년대 중반과 같은 심각한 식량난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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