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도 진화한다. 한국 영화계가 점진적인 발전을 맞고 있는 가운데 감독들의 역량도 확대되고 있다.
데뷔작을 통해 가능성을 점쳤던 감독들이 차기작을 내놓을 때마다 평단과 관객의 고른 지지를 얻어내고 있다.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의 이준익 감독, '살인의 추억' '괴물'의 봉준호 감독, '범죄의 재구성' '타짜'의 최동훈 감독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주류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작품성까지 인정받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중 '라디오 스타'와 '타짜'는 개봉 전이긴 하지만 올 추석 가장 주목받는 작품으로 비평가들의 호평에 이어 관객의 사전 관심을 끄는 데도 성공해 흥행을 예감케 한다.
한국 영화가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데는 김기덕, 홍상수 감독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독특한 시각의 영화를 만들었고, 이는 예술적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한국 관객의 지지를 받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마니아층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대중성을 확보하지는 못했던 것. 홍 감독의 '해변의 여인'이 고현정이라는 '빅카드'를 내세우는 동시에 지금까지의 어떤 작품보다 대중적인 코드를 풀어놓았음에도 전국 관객 23만 명에 그친 것은 홍 감독에 대한 대중의 선입견이 얼마나 큰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예술성과 흥행의 접점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감독은 박찬욱. 그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는 복수 3부작을 통해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관객과의 소통에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
이들 세 감독은 더욱 대중과 유연하고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메이저 제작사라는 주류 상업영화의 틀에 안착하는 한편 독특한 세계관과 작품관을 뚝심있게 드러내고 있다.
'살인의 추억' '범죄의 재구성' '타짜'를 제작한 차승재 싸이더스FNH 대표는 "세 감독은 모두 타고난 이야기꾼의 면모를 갖고 있다. 그들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사회적 접점이 확실하다"며 "동시대의 한 분야를 정확하게 짚어내 이야기하고 있어 관객이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단순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작품성은 기본, 흥행도 기본
1993년 '키드캅'으로 감독에 데뷔한 이후 '간첩 리철진' '아나키스트' '달마야 놀자' 등의 제작자로만 지내다 10년 만에 '황산벌'을 통해 감독으로 복귀했을 때만 해도 이준익 감독이 한국 영화계에서 이처럼 '대형사고'를 낼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황산벌'이 전국 관객 300만 명 가까운 흥행 성공을 이뤘지만 '잘 빠진' 시나리오와 코미디 장르라는 점에 포인트를 뒀을 뿐 그에 대한 조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감독은 이후 '왕의 남자'로 영화계에 놀라움을 안겨주며 1천230만 명을 동원, '괴물' 전까지 최고 흥행작 기록을 세웠다. '라디오 스타' 역시 그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 안성기·박중훈이라는 걸출한, 그러나 '올드'한 느낌을 주는 두 배우에게 최적의 연기를 뽑아냈으며 자연스럽게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지가 있는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로 '독특한 시각의 감독'이라는 평을 들었던 봉준호 감독은 2003년 '살인의 추억'을 내놓으며 '웰메이드 영화'라는 개념을 영화계에 뿌리내리게 했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쉽지 않은 범죄 스릴러 영화는 관객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관객은 낯설지만 잘 빠진 상업영화에 전국 550만 명이라는 수치로 화답했다.
이어 '괴물'은 봉 감독의 뚝심과 방향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영화다. 1천300만 고지를 향해가는 한국 영화 최고흥행작이면서 할리우드와는 전혀 다른 괴수영화로 차별성을 과시했다.
치밀한 구성. 2004년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에 250만 관객이 들며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른 후 '타짜'를 내놓은 최동훈 감독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단어다. 관객은 최 감독이 촘촘히 짜놓은 이야기 구조에 자신도 모르는 새 덫에 걸린 것처럼 헤어나오지 못한다.
◇남과 다른 도전 정신
이들 세 감독의 공통점은 '뭔가 새로운 것(something new)'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전인미답의 고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남들이 쉽게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을 설정해 놓는다.
이 감독은 '왕의 남자'에서 남들이 꺼려하는 사극 장르로, 그것도 철저히 평민의 시선에서 인간을 담아낸 작품을 내놓았다.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장르와 시선의 조합이었기에 흥행은 미지수였는데 관객은 좋은 작품을 알아봤다. 뻔할 듯했던 이야기인 '라디오 스타'는 관객의 감성을 건드리면서 질박한 옹기처럼 정겨운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이준익 감독은 "난 태생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 감성을 갖고 있다.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서 "차기작으로 만들 멜로 영화도 일반적인, 이쁜 멜로 영화가 아니다. 파격적인, 그 파격의 의미가 뭔지를 보여주는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은 드러내놓고 자신의 도전 정신을 즐긴다. '살인의 추억'으로 범죄 스릴러의 전형을 깼고 , '괴물'로 괴수영화의 선입견을 부쉈다.
그는 "안된다는 시선이 날 자극한다. 내가 자신 없는 뮤지컬 장르를 제외하고는 어떤 장르든지 그 장르를 망가뜨리고 싶다"며 "예술영화, 상업영화의 구분이 내겐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뿐"이라고 말했다.
두뇌게임형 스토리, 화려하면서 속도감 있는 편집을 무기로 한 최동훈 감독은 "티피컬(typical. 전형적)한 형식은 싫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특별하게 하고 싶다. 주류영화의 틀에 들어왔지만 대중과의 소통보다는 드라마의 완결성에 공을 들인다.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은연중에 살짝 드러나는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감독은 좋은 배우를 만든다
좋은 감독은 좋은 배우를 만들어낸다. 이전까지 알고 있던 배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배우들이 세 감독과 작업하고 싶어하는 건 이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은 변희봉이라는 중견배우를 새삼 발굴해냈다. 봉 감독의 세 작품에 모두 출연한 변희봉은 스스로 "봉 감독을 통해 연기자로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는 또 송강호의 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살인의 추억' 이후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던 송강호는 '괴물'을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박해일 역시 '살인의 추억'이 무게감을 실어준 배우다.
이준익 감독은 '왕의 남자'를 통해 이준기를 사회적 신드롬까지 불러일으킨 스타로 배출했다. 공길의 캐릭터는 곧 이준기의 정체성으로 보일 정도였다. 꾸준히 대중 곁에 있었으나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감우성도 이 작품을 통해 중량감 있는 연기자로 인지되고 있다. 이 감독의 '페르소나'나 다름없는 정진영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
또한 '라디오 스타'를 통해 최근 어느 감독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이젠 소중함을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대중에게 편안해진 안성기, 박중훈이라는 두 배우를 특별하고 귀중한 존재로 다시 부상시켰다.
최동훈 감독은 '범죄의 재구성'에서 백윤식을 당당한 주연 배우로 발돋움시켰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영화배우로서 역량을 타진했던 백윤식은 '범죄의 재구성'을 통해 중견배우 전성시대를 새로 쓸 만큼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타짜'는 '김혜수의 재발견'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외양의 이미지로 인해 다소 손해를 봐왔던 김혜수의 진가를 확인시켰다. 김혜수에게 있어 '타짜'는 필모그래피의 전기가 될 만한 작품이 됐다. 아귀 역의 김윤석을 대중 앞에 내놓은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좋은 작품은 배우를 드러나게 한다"는 최 감독의 말에 김혜수는 "앞으로 최 감독과 작업하는 배우를 보면 부러움이 앞설 것이다. 왜냐면 내가 최 감독과 작업해 봤기 때문"이라는 말로 화답했다.
안성기 역시 "배우를 전적으로 믿어주는 감독을 만나 정말 즐겁게 작업했다"는 말로 이 감독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좋은 감독과 좋은 배우가 좋은 작품을 만들어낸다면 관객에겐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일 것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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