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꼬마 환자의 어머니들과 함께 바닥에 둘러앉은 채 먹는 점심. 다들 아이 병간호에 지친 표정이지만 이때 만큼은 잠시 시름을 잊고 수다를 떤다. 힘겨운 현실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고픈 것은 모두 마찬가지일 터.
하지만 유정미(38·달서구 신당동) 씨는 음식을 삼키면서도 아들(김병주·14)의 침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번이 마지막 투병생활이길 빌며.
지난 2001년 말 병주는 배를 움켜쥐며 쓰러졌다. 병원에서 내린 진단은 맹장염. 하지만 유 씨가 안심한 것도 잠깐. 맹장수술을 위해 피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감기가 잘 낫지 않는다는 것이 의아했을 뿐, 별다른 증상이 없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병원에서 오진한 것이길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다시 검사를 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더군요.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엄마라면서 아이를 왜 더 일찍 병원에 데려오지 못했는지.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 이혼한 직후였기에 안타까움은 더했어요. 저 때문에 아빠도 이젠 없는데…."
긴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약물치료를 받으면서 병주의 머리카락은 하나둘 빠졌다. 학교 운동장에서 날이 저무는 줄 모르고 뛰놀며 축구선수를 꿈꾸던 병주는 하루하루 말라갔다.
유 씨는 섬유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며 병원비를 댔다. 하지만 7천여만 원에 이르는 병원비를 혼자 힘으로 감당하긴 역부족. 병주가 다니던 학교에서 모아준 성금과 각 복지기관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병원 생활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2년여에 걸친 약물치료 끝에 완치 판정을 받은 것. 병상에서 2년을 고스란히 보낸 병지는 학교를 옮긴 뒤 다시 교문으로 들어섰다. 두 살 어린 친구들과 함께. 책을 좋아해 치료를 받으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덕분인지 학교 진도도 곧잘 따라붙었다. 예전처럼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뛰어놀 순 없었지만.
웃음을 되찾은 유 씨와 병주. 단출해진 가족이지만 오랜만에 행복감을 맛봤다. 유 씨에겐 병주의 먹는 모습, 자는 모습 등 모든 것이 새로웠다. 하지만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 8월 병주 몸에 다시 백혈병이 찾아든 것. 3개 월마다 하는 피검사 과정에서 밝혀진 일이다. 길게 자랐던 머리는 어느새 다시 까까머리가 됐다. 음식을 삼켜도 토하기 일쑤.
병주가 제일 좋아하는 책은 그리스·로마신화다. 그 중 바다를 지배하는 신(神) 포세이돈을 가장 좋아한다. 병주는 강인하면서도 너그러운 포세이돈을 닮고 싶어 한다.
"아마 바다를 좋아해서 그 신도 좋아하는 걸 겁니다. 올 여름엔 둘이 바다에 가자고 약속했는데 일 때문에 바빠서 데려가질 못했어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 시간을 내는 건데…. 후회스럽네요."
코앞에 닥친 추석. 고향생각에 다들 마음이 설레지만 유 씨와 병주는 갈 곳도 없고 부르는 이도 없다. 유 씨 친정부모가 눈을 감은지 오래인데다 이혼한 처지라 병주를 데려갈 외가도 친가도 사라진 것. 추석이라 해도 이들에게 달라질 것은 없다. 추석도 병실에서 보내는 여느 하루나 마찬가지일 뿐.
"병주 병간호 때문에 직장에도 나가지 못해요.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돼 매달 지원받는 30여만 원이 한달 수입의 전분데 앞일이 막막하네요. 골수이식수술도 해줘야 하는데….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오랜 병원 생활 탓인지 병주가 또래답지 않게 걱정이 많다는 점이에요. '병원비 많이 나오지?', '엄마, 또 아파 미안해.'라는 아이 말이 절 더욱 서글프게 하네요."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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