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5월5일, 대구지방법원 1호 법정에는 대구재판사상 보기 드문 광경이 벌어졌다. 재판장의 심문이 막 시작될 무렵, 10명의 피고들 중 한 피고가 갑자기 법정이 떠나갈 듯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이따위 반동정권의 재판을 못 받겠으니 집어치워라!" 그러자 나머지 피고 중 대부분이 일제히 "옳소!" "집어 쳐라"하고 맞장구를 쳤다. 초만원을 이룬 공판정은 순식간에 소란해졌다. 단상의 재판장과 배석판사들은 충격을 받은 듯 노한 얼굴이더니 이내 휴정을 선언했다.
얼마 뒤 속개된 공판에서 고함에 동참한 피고들은 구형량보다 훨씬 무거운 판결을 받았다. 사형이 4명, 무기징역이 3명, 10년 징역이 1명이었고, 여자 한사람과 나머지 한 명만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사형언도를 받게 된 4명 중 두 명은 당초 10년 구형이었으며, 무기징역언도를 받은 3명은 각각 5년, 4년, 3년의 구형이었다. 통상 구형량에 비해 선고량이 적게 나오는 항례와는 반대인 이런 판결은 재판정에서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피고들의 극언에 판사들이 얼마나 격노했냐는 반증이었다. 그렇기로서니 중형판결을 내린 것은 너무했다는 방청석의 반발도 있었다.
세칭 '용두방천무장봉기음모사건'재판으로 불린 이 재판은 좌익청년단체맹원들로 구성된 피고들이 "용두방천에 장총과 수류탄을 숨겨두고 무장봉기를 꾀했다"는 혐의였다. 압수한 무기들을 제시하며 구형한 사람은 뒷날 법무장관이 되는 김치열(金致烈)검사였고, 재판장은 뒷날 대구고법원장이 되는 김용식(金龍式)판사였다. 그 아래 노변건, 이종락 두 판사가 배석했었다. '폭동음모범'으로 중형을 선고받은 8명은 김종수(32세), 황경옥(28), 박석만(27), 최인환(27) 김수명(27), 김용문(24), 양남준(23), 양구영(19) 등 청년, 학생들이었다.
이날 징역3년의 구형을 받았다가, "옳소!"란 맞장구 한번으로 '폭도'의 일원이 되어 무기징역언도를 자초한 양구영(楊九煐)은 대륜중학 3학년생으로, 미성년이었다. 구영의 가족들은 그렇잖아도 남로당 대구동구 오르그로 활동하다가 구속(뒷날 처형)된 구영의 둘째 형 사건도 있어, 구영의 감형을 위해 천신만고로 손을 쓰던 중이었다. 그 노력이 결실을 볼 순간, 어이없게도 구영 자신이 뇌동하여 일을 그르치고 만 것이었다. '사건'의 단순한 연락책이었고, 중학 하급생이었던 만큼 웬만하면 집행유예쯤으로 풀려 나리라던 기대가 물거품이 된 셈이었다.
설익은 이상주의에 젖어있던 청년들은 중형을 받고서야 항소들을 했다. 평상의 시국이었다면 대부분 몇 년간의 옥살이로 그럭저럭 풀려날 몸이었다. 그러나 시국은 불행히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1년 뒤 북의 기습남침으로 나라가 위급하자, 좌익수들이 제일 먼저 보복의 대상이 되었다. 핏발이 선 군경들에 의해 이들은 다른 좌익수며 보도연맹원들과 더불어 '가창골'의 원혼이 되고 말았다.
청렴강직하기로 소문났던 김용식 재판장은 퇴직 후 변호사로 지내던 1963년 5월18일, 67세를 일기로 대구 동성로 자택에서 돌연 자살함으로써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가난과 고독이 주원인이었다는 소문과 함께, 지난 일들이 괴롭게 회상되어 심한 우울증을 앓던 끝에 세상을 하직했다는 풍문도 돌았다. 그의 회상 속에 이 '중형선고재판'이 끼어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들 청년학생들의 경우, 순간의 '객기'가 죽음의 문턱을 밟게 한 탓도 있지만, 설사 중형을 면했다 쳐도, 1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피고라면 누구든 '골'로 갈 수밖에 없는 '광란의 시국'이 되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런 시국을 만든 남침의 주역들이 바로 그들 사상의 지배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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