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먼 나라 시인 구보씨의 닷새

입력 2006-07-31 08:23:23

구보 씨가 사는 동네에는 아름다운 못이 하나 있다. 그 아름다운 못은 건물과 도로가 많은 그곳의 숨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비 오는 봄날 흐드러지는 벚꽃길과 주위 불빛이 수면에 얼비치는 밤의 못은 동네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도시 사람들 모두가 너무나 사랑하는 풍경이다.

가끔 잠을 못 이루는 밤이면 구보 씨는 아무렇게나 편한 차림으로 어두운 방을 뛰쳐나와 못으로 간다. 늦은 밤에도 휑하니 내달리는 차들을 보며 못으로 가는 길은 걸어서 한 이십 분 남짓 거리.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낮의 일이나 창가에 얹어두었다가 말라버린 화초 걱정, 매주 한 번씩 자신의 시 강의를 듣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분명히 그들이 요구하는 것과 내가 가르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어...".

타닥, 튀어나온 보도 블록이 발끝에 부딪친다. 아프다. 그러다가 순간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하는데..." 혼자 중얼거린다. "이 아픔을, 이 생생함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그 사람들에게 전달해 줘야 하는데..."

그러다가 버려진 과자봉지를 밟는다. 과자가 남아 있었는지 밟히는 소리가 유난하다. "그래, 도저히 안될 말이지. 내가 누구를 가르치겠어. 겨우 화초 한 뿌리도 책임지지 못해 죽여버리는데, 내일 당장 그만 둔다는 말을 해야겠군."

급격히 우울해진 구보 씨는 문득 '세계는 어둡고 길이 없다'라는 누군가의 극단적인 말을 떠올린다. "나는 정말 이 어두운 밤에 아무 뜻도 없는 걸음질이나 하고 있는 것이야. 지금 가고 있는 이 못도 우리 먼 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이웃나라 관리가 축조했으니 메워버리자는 기초의원이 있었다던데. 참으로 혼돈과 밤뿐이군".

한숨처럼 한 줄기 바람이 스친다. 이제 저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못이 나타날 것이다. 구보 씨는 잠시 망설인다. 그냥 돌아갈까. 웬지 내키질 않는군. "퇴폐적이며, 부도덕하고, 비윤리·사이비 같은 시를 내팽개치겠다"고 소리치던 누군가가 떠오른다. "절대로 여기서 배웠다는 표식을 내지 않겠어요" 매몰차게 내뱉던 누군가도 떠오른다. 돌아갈까.

잠시 서서 망설이다가 구보 씨는 횡단보도를 건넌다. 약간 비릿하고 싸한 물내음과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들린다. 말갛게 씻은 듯한 달빛 수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묶여진 오리배들이 얌전하게 눈을 내리깔고 즐겁게 흔들거리고 있다. 그리고 불빛. 지금 막 붓을 든 오지호나 고흐가 그리는 거대한 화폭이 바로 이럴 거라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그래 숨구멍이구나. 밤은 혼돈만을 품고 있는 건 아냐. 참으로 예쁘고 사랑스러운 못은 잠시 세상이 질병 같은 어둠과 혼돈뿐이라고 절망한 바보 구보 씨에게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박미영(시인·대구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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