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에 대구경북의 좌익을 대변한 신문은 '민성일보'(民聲日報)였다. '민성일보'는 대구언론사상 몇 가지 특이한 기록을 남긴 신문이다. 첫째, 해방 한 달 뒤인 9월15일에 창간되어, 10월3일의 '대구시보'나, 10월11일의 '영남일보', 이듬해에 창간된 '남선경제신문' 보다 먼저 창간된 신문이었다.
둘째, '민중(인민)의 소리'란 뜻인, 제호 자체부터 지역지의 개념을 뛰어넘는 강한 전투성과 진취적 기상을 표방한 신문이었다. 셋째, 창간 후 서너 달 동안은 매일 4천부를 찍어내, 잠시나마 대구에서 제일 많은 발행부수를 기록한 신문이었다. 이 기록은 46년 초, 반탁민심이 거세지면서 중도우익지인 '영남'에 의해 깨어지지만, 우익지인 '대구'나, 중도좌익지인 '남경'에 비해 '민성'은 처음부터 좌익의 대변지를 공언한 신문이었다.
'민성'의 초대발행인 겸 사장 이목(李穆)은 일제 때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가 옥살이와 창씨개명 끝에, 경북 군위군의 금융조합장과 배급조합장을 지낸 인물이다. 편집인 도재기(都在琪) 역시 일제 때 야기 미츠하루(八木光治)란 이름으로 대구에서 경상물산주식회사 사장을 하던 사업가였다. 친일과거사를 헤집는 좌익지의 최고 간부치곤 그들 역시 약점이 적지 않은 인사들이었던 셈이다.
'민성일보'의 또 다른 기록은 휴간을 많이 했다는 점인데, 원인의 대부분이 강경한 좌파적 논조 때문이었다. 46년 9월27일부터 보름간 자진휴간한 것은 '9월 총파업'과 10.1사건의 여파였다. 그러나 경쟁지들이 대부분 10월12일부터 속간을 했음에도 '민성'만이 두 달쯤 뒤인 12월8일에야 속간을 했다. 이목 사장이 10.1사건의 선동혐의로 구속되어 회사간판을 내릴만한 위기였던 탓이다. 편집국장이던 민영근(閔榮根)이 2대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되어 가까스로 속간은 했으나, 이 후 우익의 테러공세로 만신창이가 되어야만 했다.
47년 3월29일, 권총과 곤봉, 도끼로 무장한 우익청년들이 습격, 활자와 인쇄기를 파손한데 이어, 회사간판까지 떼어간 게 테러의 시작이었다. 6월 26일에도 괴한 5~6명이 공장을 습격, 활자케이스 4개를 뒤엎고 인쇄기를 파괴하고 달아났다. 이럴 때마다 1주일 전후의 휴간이 불가피했다. 이 밖에도 배달 업무를 방해당하고 구독자가 협박당하는 일이 잦았다. 또 편집국장과 기자들이 하찮은 일로 2~3일씩 구속되기 예사였다.
수난으로 휴간이 거듭되자 독자는 자꾸 떨어져 나갔다. 48년 10월25일 현재의 발행부수가 '영남'이 2만3천부, '대구'가 1만3천부, '남경'이 8천3백 여부임에 비해, '민성'은 겨우 6천7백부였다. 종사원수도 '영남'이 150명, '대구'가 139명, '남경'이 83명임에 반해 '민성'은 고작 46명이었다. 그만큼 경영이 어려워, 좌익의 열성맹원들로 구성된 사원들은 쥐꼬리봉급보다 '투쟁'을 한다는 오기로 버텨내고 있었다.
부수가 적은 좌익지다 보니 광고주들이 잘 붙지 않았다. 영화광고와 함께 꾸준하게 실린 광고는 다른 신문에선 드문 의원광고였다. 대광의원(배상우), 동광내과의원(정하택), 서소아과(서길영), 안소아과(안지열), 준명의원(최준향) 등이 특히 많이 실었다. 신문사를 돕기 위해 경제력 있는 전문의들이 자진해 내는 협찬광고였다. 이들은 '보건동맹'에 가입한 좌익동정파 의사들이긴 했으나 실정법을 어긴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고깝게 보아온 미군정경찰은 47년 11월 대구의 개업의사 12명을 군정법령위반 혐의로 연행, 이중 배상우, 김윤건, 서길영, 김상인, 안지열, 정원락 등 6명을 무더기로 구속하기도 했다. 의사들의 협찬광고마저 끊긴 '민성일보'는 48년 말 그 상큼한 제호며, 신형 윤전기, 특유의 '전의'에도 불구, 부음도 못낸 채 끝내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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