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1천리를 가다] (15)강구수협 중매인 박창현 씨

입력 2006-04-29 07:47:50

박창현(35) 씨는 강구수협 중매인 3호다. 그의 일은 강구항에서 바다와 어민을 연결해주는 수산물 유통의 첫 관문 역할을 하는 중매인이다. 햇수로는 겨우 5년째지만 나란히 암으로 돌아가신 부모의 대를 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박 씨의 나이와 같은 35년째인 셈이다.

선친은 박 씨가 태어난 1972년에 중매인 생활을 시작했다. 이 점에서 박 씨는 중매인이 자신의 운명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대구에서 초·중·고를 나와 경북대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중매인일 뿐 자신하고는 별 관계가 없는 일인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1987년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등진 뒤 어머니가 이를 이어 받을 때만해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친한 사이가 아니면 경조사에도 서로 얼굴을 내밀지 않는 치열한 중매인들간의 경쟁과 남자들도 쉽지 않은 일을 어머니가 하고 있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외동아들이라는 책임감도 더 해졌다.

결국 대학에 진학한 뒤 1년만에 휴학을 했다.

"이 때부터 어머니 밑에서 중매인 수업을 받기 시작했는데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코피를 흘려가며 일에 매달렸습니다. 선친은 물론, 어머니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으려고 했지요. 그래도 재미가 있어 어느 한 순간 이 일이 바로 내가 앞으로 먹고 살아가야 하는 일이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그렇게 10년. 박 씨는 지난 2001년 어머니가 암으로 투병생활에 들어가면서 상속이 가능한 중매인 자격을 얻어냈다. 중매인으로 나선다는 것은 더 큰 어려움이 있음을 뜻한다.

여름철이면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경매현장으로 달려가기 때문에 아침을 거를 수밖에 없다. 다른 중매인들과 경쟁을 벌일 때 마짝 타들어가는 속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줄담배 뿐이었다. 경매가 끝나면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어민들과 소줏잔을 기울인다. 이렇다보니 몸이 망가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에게 받은 10년간의 혹독한 훈련은 자연스럽게 박 씨의 최고 강점이 됐다.

지난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매출 1위를 놓친 적이 없고 강구수협은 박 씨의 능력을 인정해 이 새내기에게 표창장을 주기도 했다. 대부분 40, 50대 이상으로 관록을 자랑하는 중매인들 틈바구니에서 박 씨가 선두를 달릴 수 있었던 비결은 공부였다. 수산물의 경우 기상상황에 따라 조업량이 달리지는 탓에 항상 일기예보에 주의를 기울이고 나름대로 날씨를 분석했다. 또 중매인의 가장 큰 역할이 좋은 수산물을 싸게 사 상인들에게 넘기는 것인 만큼 시장의 흐름을 읽는데도 게을리하지 않아 다른 이들보다 앞서 나갈 수 있었다. 또 다른 재산은 휴대전화에 입력된 900여명이 넘는 인적자원이다.

박 씨로부터 수산물을 넘겨 받은 상인들은 손해를 본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이 주변사람들의 말이다. 그래서인지 박 씨의 휴대전화에는 900여명의 전화번호가 입력돼 있다.

"휴대전화에 들어있는 900여명이 전 재산입니다. 거래처와 활어차 운전기사, 기상대, 해경, 어민 등등 저를 먹여살려주는 고마운 분들이 다 들어 있는 거죠."

지금은 강구항에서 3번 중매인하면 박 씨의 이름이 그냥 나올 정도로 유명인사가 됐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벌써 제자를 1명 길러냈으며 두번 째 제자는 한창 수업중이다. 또 더 열심히 살기 위해 하루 두갑씩 피우던 담배도 3개월 전에 끊고 매일 수영으로 체력관리를 하고 있다.

"새벽시장에 한 번 나와 보십시오. 생선이 펄떡 펄떡 뛰는 것처럼 힘을 마구 솟아나게 만드는 그 어떤 것이 새벽 시장에 있습니다. 제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가장 강하게 받는 순간이 바로 새벽 시장에 발을 디딜 때입니다."

아마 그는 처음부터 새벽시장에서 살아야할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영덕·이상원기자 seagul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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