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소로리 볍씨를 생각하며

입력 2006-03-31 09:56:42

1998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이곳에서는 기존학설을 뒤집는 경이적인 유물이 출토돼 세계를 놀라게 했다. 무려 1만 5천년 전의 것으로 확인된 59톨의 볍씨가 나온것. 당시 가장 오래된 볍씨 기록으로는 중국 화북지방에서 발견된 것으로 1만500년 전이었다. 따라서 기존 학설은 우리나라 경우 벼가 중국이나 인도를 거쳐 도입됐을 것으로 설명했다.

새 볍씨 출토로 오히려 한반도가 벼의 발원지일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게 하고 국제적으로도 현재 가장 오래된 볍씨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세계 최고(最古)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벼가 미국 등 소위 개방화 세력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과거 1980년 흉작으로 외국쌀을 수입, 식탁에 올린 것을 제외하면 사상 처음 수입쌀로 밥을 먹게 되는 상황이 4월부터 벌어지는 셈.

세계 농산물의 자유로운 거래를 위해 지난 1986년 시작된 우르과이라운드(UR) 협상 이후 꼭 20년만의 일이다.

우리는 그동안 국내 농산물 시장 개방은 농촌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란 우려로 인해 쌀 만큼은 개방을 않고 일정 물량 만큼만 수입, 밥쌀 이외 용도(가공용)로 활용해 왔다. 그러나 미국 등 쌀 수출국들의 압박으로 올해부터 매년 일정량 이상의 수입쌀을 밥쌀용으로 팔게 됐다.

문제는 곧 쏟아질 미국 칼로스 쌀이나 호주 선라이스, 중국 칠하원 쌀, 태국 안남미가 비록 국내 전체 쌀 소비량의 1%에도 못 미치는 소량이지만 우리 쌀이 맞붙어 과연 경쟁에서 살아남아'소로리 볍씨'처럼 우리 쌀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사실 정부는 UR협상 이후 우리 농업의 위기극복을 위해 102조 원 사업 등 천문학적 예산이 투입된 많은 정책들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기대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국민들로부터 불신마저 샀다.

특히 정부는 세계화와 개방화 농정이라는 국제적 흐름에 맞춰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정치권 역시 시대흐름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표를 의식, 쌀시장 지키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서도'한 톨의 쌀도 들어오지 않도록 하겠다'는 등 '뻔한 거짓말'로 국민들을 속이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이런 점에서 우리처럼 쌀 관세화를 유예받았으나'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 과감하게 관세화 유예를 포기한 대신 관세화로 승부수를 던진 일본의 대처방식이 부러울 뿐이다.

일본은 관세화 결정에 앞서 정부·정당·농민단체 등 이해 당사자격인 3자대표들이 수년 동안 머리를 맞대고 입장을 조율, 관세화를 결정하게 됐다고 일본 농림수산성 한 간부는 관세화 결정 당시 배경을 들려주었다. 정부는 농민들 어려움을 이해, 지원책을 마련하고 농민들은 경쟁력 강화를 위한 품질향상 등'강한 농민' 되기에 나섰고 정당은 제도적 뒷받침에 힘쓰는 등 역할분담과 지혜 모으기로 개방압박에 대처해 왔다는 것. 이런 합의를 이끌어낸 농림수산성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일본 사정을 잘 아는 한 외교관은 국민 먹거리문제를 책임진 만큼 농림수산성의 자부심과 위상이 상당하다고 했다. 우리 농림부 위상과는 천양지차라고도 했다.

일본처럼 농업 담당 정부부처의 상당한 위상은 미국 농무부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미국 경우 농업이'특별한 산업'으로 다뤄지는 소위'농업기본주의'가 국민 인식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을 정도로 농업을 중요시하고 있다. 제16대 링컨 대통령은 취임한 이듬해인 1862년 농무부를 창설했고 당시 대통령은 농무부를'국민의 부처'(People's Department)라 불렀다고 한다. 그 탓인지 농무부 건물 현관에는 링컨 대통령의 흉상이 있고 농무부는 국방성 다음으로 큰 규모의 위상을 자랑하면서 농민들 이익 대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며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는 것.

그러나 우리 농림부 위상과 역할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이제 수입 쌀이 우리 밥상에 오르게 된 사상 초유의 상황을 맞아 세계 최고의 볍씨를 남긴 이 땅의 농민들을 위해 그리고 미래를 위해 농림부 아니, 정부가 나서야 할 때가 됐다.

정인열 사회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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