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시장 대화재> 긴박했던 화마와의 결투현장

입력 2005-12-30 10:34:33

소방차 100대 물살 비웃듯 火魔 삽시간 건물 삼켜

1천여 명의 소방대원이 출동하고 100여 대의 소방차가 밤새도록 물을 뿜었지만 화마는 수그러지지 않았다. 검은 연기는 쉴새없이 피어 올랐고 매캐한 냄새는 시장 전체를 휘감았다.29일 밤부터 30일 오전까지, 세밑 대구 서문시장은 전쟁터였다.

◆악몽같던 시간들

29일 밤 10시쯤 대구시 중구 대신동 서문시장 2지구 1층 상가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순찰중이던 한 경비원의 신고로 100m 거리에 있던 소방파출소가 현장에 출동한 시간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금방 불길이 잡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영업이 끝난 시간인지라 모든 점포의 상가 셔터가 굳게 내려져 있어 초기 대응이 늦어졌다. 게다가 상가 안에 가득 쌓인 물품들은 대부분 의류와 잡화 등 불에 취약한 것들. 불길은 금세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빨리 들어가 진화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방관들은 상가 셔터문을 부수고 진입했다. 그러나 이번엔 맹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유독가스와 연기가 비수를 들이댔다. 이미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으로 변해 있었던 것. 소방관들은 건물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20여 분 만에 불길은 2층도 집어삼켰다. 의류, 원단, 각종 섬유제품이 무더기로 쌓인 2층에서 불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마구 춤을 췄다. 소방차 100여 대와 소방대원 1천여 명이 붙었지만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굴절차와 소방차에 올라 일제히 물을 뿌렸지만 역부족이었다. 물길이 건물 깊숙한 곳까지 닿기 만무했다.

상황은 급박해졌다. 오후 10시 50분쯤 "어, 3층으로 올라갔다"는 함성이 곳곳에서 터졌다. 불은 섬유원단 점포가 즐비한 맨 꼭대기층까지 점령하고 만 것.

한 소방관은 "유독가스와 연기 때문에 화재 진압이 어렵다"며 "이젠 옆 건물로 옮겨붙지 않도록 하는 방법뿐"이라고 낙담했다. 하지만 건물 밖에서 물을 뿌리는 것만으로는 빠르게 세력을 넓히는 불길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결국 건물 진입을 시도했다. 큰 불이 어느 정도 잡힌 1층과 2층에 수십 명의 소방관들이 필사적으로 들어갔다. 40분 분량의 산소통 하나에 의지한 채 몸을 던진 소방관들의 용기는 효과가 있었다. 오후 11시 30분쯤 붉은빛은 점점 사라졌다.

현장에 있던 많은 시민들은 "이젠 3층의 불만 남았다"고 입을 모았다. 소방관 몇 명이 호스를 끌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 환기통을 통해 아래로 물을 뿌려 댔다.

자정이 지나면서 유독가스와 연기는 더욱 뿜어져 나왔지만 불길은 잦아들었다. 이젠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불은 다시 살아났다. 맹렬히 섬유제품들을 집어삼켰다. 검은 연기가 옥상을 뒤덮었다. 수차례에 걸친 3층으로의 진입도 실패했다.

한 소방관은 "소방차의 물이 동이 나는 바람에 소화전에서 물을 끌어쓰고 있는데, 상수도관은 하나뿐이라 수압이 약해져 진화가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30일 오전 1시 30분쯤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다. 옆 건물 3층으로 불이 옮겨붙었다. 절망적이었다. 현장 주위는 불의 확산을 막지 못한 소방관들을 나무라는 고성들로 아수라장을 방불했다. 건물 밖에서 물을 계속 뿌렸지만 2지구 상가 전체가 잿더미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 개라도 건져라

29일 밤 10시30분쯤 신남네거리에서 서문시장까지의 인도에 수많은 사람들의 마라톤 행렬이 이어졌다. 서문시장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점포에 피해가 없는지, 챙길 수 있는 물건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 달려나온 시장 상인들의 질주였던 것.

한 상인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검은 연기 속으로 뛰어들다 경찰과 승강이를 벌였다. "제발 들어가게 해주세요. 점포 외상 장부를 꺼내 와야 합니다. 2지구 상가는 '도매' 비중이 높아 외상 거래가 많기 때문에 외상 기록을 잃어버리면 전 재산을 잃은 것과 똑같아요." 그의 절규는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아직 불이 옮겨붙지 않은 가게 상인들은 너도나도 자신의 짐을 다른 곳에다 옮기기 바빴다. 2지구 상가 옆 주차빌딩 1층은 여기저기서 상인들이 빼내온 짐들로 '6·25 피난터'를 방불케 했다. 어깨에 원단을 짊어진 상인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복도, 통로마다 원단 더미가 홍수를 이룬 것.

구돌선(55·여) 씨는 "언제 우리 가게로 불이 옮겨붙을지 몰라 일단 값나가는 원단들만 챙겨 나왔다"며 "20여 년을 이곳에서 장사하면서 이런 불은 난생 처음"이라고 치를 떨었다.

화재 소식을 듣고 대구 서구 내당동에서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는 문정화(64·여) 씨도 "불 때문에 평생 모은 것을 다 잃을 수는 없다"며 한개라도 건지기 위해 검은 연기 속을 헤치며 뛰어다녔다.

정욱진 기자 pencho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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