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

입력 2005-12-07 16:47:43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

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

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

고재종(1957~ ) '동안거(冬安居)'

우리 옛 가요에서는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모란눈이라 표현했습니다. 모란꽃송이처럼 크고 굵다는 뜻이겠지요. 시인은 목화송이에다 비견하고 있군요. 그 어떤 비유인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모든 것이 자연 속에 보금자리치고 있었던 친근한 사물들이니까요.

근년에는 눈이 제법 왔더랬습니다. 밤중에 마당 가득 쌓인 눈을 아침에 대면하는 일이란 얼마나 눈부신 감격이었습니까. 눈오는 밤에 쪄서 먹는 밤고구마! 생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돕니다. 맛있게 잘 쪄진 고구마는 삶은 밤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장광이란 말도 참 오랜만에 듣는 정겨운 단어로군요. 살얼음이 살짝 끼어있는 동치미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지요. 삶은 고구마와 살얼음이 얼어있는 동치미 한 사발! 이것이면 그 해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지요.

3연에서 시인은 힘든 세월을 이겨 가는 삶의 지혜로움에 대하여 동치미 위에 낀 살얼음처럼 슬쩍 지나가는 말로 코멘트합니다. 폭설로 모든 길이 다 끊겨도 강변의 미루나무는 오직 하늘로만 자신의 길을 열어두고 있으므로 아무런 염려가 없다고 하는군요. 저는 눈오는 한라산에서 보았습니다. 길 표시를 위해서 박아놓은 장대 말입니다. 그 장대는 모란눈 속에 파묻혀서도 오직 하늘로 자신의 길을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눈 속의 미루나무처럼 이번 겨울을 씩씩하고도 여유롭게 잘 이겨 가시기 바랍니다.

이동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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