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손도 꼼짝않는 남편들 많죠?

입력 2005-10-15 09:33:32

맞벌이를 하는 주부 이모(39) 씨. 새벽에 일어나 밥하고 남편, 아이들 깨워 회사, 학교 갈 준비시키느라 정작 자신은 밥 한 숟가락 못 뜨고 출근하기 바쁜 직장 여성이다. 퇴근 후는 또 어떤가. 잠시 쉴 틈도 없이 저녁 식사 준비하고 설거지, 청소, 빨래, 아이들 숙제 봐주기 등 할 일이 태산같다.

"결혼생활 10년=남편 '웬수' 아닙니까. 회사 일로 지쳐 집에 돌아와도 해야 하는 집안 일이 산더미 같은데 퇴근이 늦는 남편은 한번씩 일찍 와도 TV 보고 컴퓨터 게임하며 손도 까딱 않으니 정말 속상해요."

맞벌이 부부의 풀리지 않는 숙제인 가사 분담. 최근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 하는 남자'(아침이슬) 책을 펴낸 미국 버클리대 사회학과 알리 러셀 혹실드 교수는 맞벌이 부부의 가사 분담 문제가 행복한 가정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고 진단한다. 맞벌이를 하는 아내들은 직장일과 가사·육아에 시달려 남편과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박탈당하고, 남편들은 가사·육아 책임을 면제받지만 아이 키우는 재미를 누릴 기회를 박탈당하고 가정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젊은 남편들은 집안 일도 잘 나눠 한다는데 좀더 늦게 태어나지 못한 게 한입니다."(50대 아내), "집안 일을 많이 거드는 남편이 그만큼 아내에게 잔소리도 많이 하지요."(40대 남편), "냉장고 청소를 하니 그릇에 '미라(오래 돼 먹을 수 없는 반찬)' 투성이고 바닥을 쓰니 머리카락하며 먼지가 얼마나 많은지 아내의 실체를 파악했습니다."….

▲ 우리부부 울컥벌컥 극복기

교사인 윤석희(44·압량대구 서부공고·대구시 수성구 욱수동)·권미해(41. 경산초교) 씨 부부.

" 처음에는 남편이 많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바가지를 긁었지요. 그런데 어느날 남편이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욕심이 너무 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른 주부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객관적으로 제 남편이 집안 일을 많이 거드는 편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아내)

"남편도 당연히 집안 일을 해야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사실 집에 오면 쉬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사일을 도와달라는 아내가 솔직히 예쁘게만 보이지 않았지만 차차 마음을 열었습니다. 아내가 힘들어하니 더 해주고 싶지만, 많이 거들지 못해 미안할 뿐입니다. 게으른 편이지만 부지런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남편)

이들부부는 다니는 학교가 달라 주말부부로 지내기도 많이 했다며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서로를 더욱 소중히 생각하게 됐다고 말한다.

"아침에 밥을 먹고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식사 준비를 하는데 남편은 빵, 우유로 간단하게 먹어도 된다며 한번씩 빵을 사들고 오네요."

요즘 대학원 석사 논문을 준비하느라 밤잠을 설치는 아내가 좀더 잠을 잘 수 있도록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자는 남편의 마음이 따뜻하다.

이 부부는 일부러 정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집안 일을 나눠 하고 있다. 식사 준비는 아내의 몫. 하지만 집안 청소는 100% 남편이 책임진다.

"남자는 힘이 좋아 청소를 해도 확실히 할 수 있습니다. 군인정신을 발휘해 높은 데도 싹싹 닦아내는등 깨끗이 청소를 하고 나면 마음이 개운해집니다."

윤씨는 아파트 1층에 살 때 베란다 밖 꽃밭에서 새시 문 청소를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이웃 아주머니들로부터 "어느 업체 아저씨인지 소개 좀 해달라"는 얘기까지 들었을 정도다.

퇴근 후 세탁기를 돌려놓고 피곤해 먼저 자는 아내를 위해 빨래를 널고 아이들이 창문을 열어둔 채 자지나 않는지 뒷마무리를 하는 윤씨. 준혁(15), 준원(12) 두 아들에게도 플라스틱·종이 등 분리 수거를 담당시키고, 무서움이 많은 아내 대신 밤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다.

"아내가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걸 시키는 건 심한 것 같다고 얘기하는 남편들이 많던데 아내를 위해 해주면 좋지 않습니까. 물론 냄새나는 거야 좋을 것 없지만요."

아내는 빨래를 개어 일일이 서랍 안에 넣어놓지만, 아이들 빨래는 직접 개어 가져가라고 시키는 윤씨. 방 전구를 갈 줄도 알아야 한다며 아이들에게 해보라고 가르치는 그는 집안 일을 많이 한다고 아내에게 잔소리하는 법은 없다고 했다.

"같은 교사 입장이니까 아내 일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는데 어떻게 잔소리를 합니까. 주방에 설거지거리가 잔뜩 쌓여 있어도, 집안이 어질러져 있어도 군소리 안 합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바라기만 하면 끝이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이들은 부부가 서로 이해하고 위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글·김영수기자 stella@msnet.co.kr

사진: 교사인 윤석희(44·압량대구 서부공고·대구시 수성구 욱수동)·권미해(41. 경산초교) 씨 부부.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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