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치매와 중풍

입력 2005-09-12 11:51:11

1994년, 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나는 이제 인생의 황혼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렸음을 솔직하게 밝힌 레이건에게 세상사람들은 안타까움과 동정 어린 눈길을 보냈다. 치매가 세계적인 화제가 됐고, 이 병의 치료법 연구에 가속력이 붙기 시작했다.

◇ 그로부터 10년, 레이건은 아내 낸시의 헌신적 내조 속에 행복한 황혼 여행을 했다. 비록 자신이 한때 미국 대통령이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50여 년 함께 산 아내조차 못 알아볼 정도였지만 작년 93세를 일기로 타계하기까지 천진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낸시에겐 인고의 세월이었다. "사랑하는 이가 조금씩 해체돼 가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정말 힘들어요"라던 낸시는 대화조차 통하지 않는 남편에 대해 "길고 긴 이별"이라는 말로 그 슬픔을 표현했다.

◇ 2000년대 한국 치매 노인들이 처한 상황은 자못 애달프다. 1년 전, 서울 오류동의 한 아파트에서 90대의 허모 할아버지 부부가 목매달아 숨진 채 발견됐다. 빚을 얻어 1년여 동안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자녀들로부터 도움 얻기도 힘들고, 달리 더이상 돈을 마련할 수도 없어 막막한 심정에 택한 길이었다. 할아버지는 달력 뒷장에 유서를 남겼다. "78년이나 함께 산 아내를 죽이는 독한 남편이 됐다. 살 만큼 살고 둘이서 같이 떠나니 너무 슬퍼하지 마라."

◇ 치매만큼 잔인한 질병도 드물다. 사랑하는 사람이 망가져 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큰 고통이다. 가족 외엔 누구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고, 가족도 인내로 견딜 수밖에 없다. 치매 환자의 가정에선 웃음이 사라진다. 모두가 지치고, 신경은 송곳 끝처럼 뾰족해지며, 가정이 풍비박산 나기도 한다.

◇ 정부가 치매와 중풍 노인을 국가가 돌보도록 하는 내용의 '노인수발보장법'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로 노인 인구가 9%를 넘어서고 치매와 중풍 환자 또한 크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핵가족화, 맞벌이 부부 증가, 간병의 장기화 등으로 이들 환자를 가족들이 돌보는 것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데서 비롯된다. 노인수발보장법은 간병과 수발, 목욕, 가사 등 일상활동을 국가가 지원하는 것이 주내용이 될 전망이다. 치매와 중풍 환자를 둔 가정의 한숨 소리가 사라질 날이 빨리 오기를….

전경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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