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일본 지우기

입력 2005-08-12 11:49:53

광복절이 돌아왔다. 환갑을 맞은 올 광복절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매스컴마다 경쟁적으로 특집을 다루고 있고 올해도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용어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마침, 국가보훈처가 미니홈피에 일제 잔재 뿌리뽑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일본말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는 취지에서 네티즌 40여 명이 참여해 매일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녹아있는 일본말을 올리고 있다. 여기에는 곤색(감색), 아나고(붕장어), 찌라시(광고지), 엑기스(진액)… 등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사용하는 일본말들을 많이 올려놓았다.

국립국어원도 '후카시'의 우리말 순화어를 '품재기'로 결정하는 등 잔존해 있는 일제 흔적 지우기에 가세했다. 산업자원부 산하 기술표준원은 '표준색 이름 개정안'을 내놓고 일제가 붙였다는 옛 이름 대신 '병아리색', '살구색' 등 동식물 이름으로 바꿔 버렸다.

대학가에서도 경쟁적으로 친일 교수 명단을 발표하는 등 '친일 잔재 청산' 바람이 거셌다. 대학 구내의 수십년 된 나무가 '일본인이 심었다'는 이유만으로 잘려 나가고 공공시설물에 걸린 현판과 영정이 친일 관련 인사의 작품이란 이유로 뜯겨 나갔다. 쇠말뚝 뽑기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일본제국주의가 36년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우리 땅에 남겨놓은 온갖 형태의 부정적 유산을 의미하는 '일제 잔재'라는 단어가 60년이 지나도록 우리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다.

섶에 누워 자고 쓰디쓴 곰쓸개를 핥으며 패전의 굴욕을 되새겨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복수를 한 오왕 부차(夫差)와 월왕 구천(句踐)처럼 일제에 짓밟힌 치욕을 곱씹으며 되새기지는 않더라도 일제 잔재 청산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역사라는 점은 인식해야 한다. 일제 잔재 청산이 광화문 중앙청 청사 철거와 같은 흔적 지우기로만 진행될 때는 자칫, 또 다른 역사말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제 잔재'라는 말만큼 집단 주술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용어도 찾기 힘들 것이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식민 통치하는 과정에서 온갖 억압과 착취를 자행했다. 또 민족 정기 말살 등 정신마저 뺏어 가려 했다. 이를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이 동원됐다. 해방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일제의 찌꺼기. 이는 가려내 바로잡는 것이 우리의 도리다. 그러나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조사 및 평가 작업은 않고 한 단면만 보고 '일제 잔재'라며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한때 광풍(狂風)처럼 몰아닥쳤던 '대학가의 친일 청산 바람'에 대해서도 지식인 사회를 중심으로 성급한 행동이라는 지적이 조심스레 나왔었다. 친일 청산 문제는 학문적이고 조직적으로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찾게 되면 세 곳은 반드시 방문한다고 한다. 하나는 '통곡의 벽'으로 여기서 이스라엘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인이 로마 군대에 맞서 최후의 한사람까지 장렬하게 전사한 '마사다성'. 유대인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장소다. 세 번째는 나치 치하에 학살당한 600만 명의 참상을 기념하는 '야드베쉼'이라는 민족 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은 유대인 대학살의 참상을 절대 잊지 말자는 다짐으로 지어졌다. 과거를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는 다짐의 장소라고 한다.

11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일대기 출판기념회가 대구 동구 신천동 한 장소에서 열렸다. 한 민간단체가 일본인 저자의 한국어판 책 발행 기념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위안부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일제의 잔혹 행위를 고발한 책이다.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한 우리네 노력의 하나다. 왜곡된 역사교과서 채택 등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소리쳐봐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잊을 만 하면 터져 나오는 일본 정계 인사들의 침략전쟁 미화발언. '일본 지우기'를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지. 갑갑하다.

사회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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