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제주사

입력 2005-07-09 08:36:11

새로 쓰는 제주사/ 이영권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아름다운 섬 제주. 한 해 평균 49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제주는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관광지다. 지난해 관광 수입만 1조6천700억원에 달할 정도. 이국적 풍광의 제주는 지친 일상과 도시의 번잡함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안식의 공간으로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생각의 시계를 앞으로 돌려보자. 조선시대에도 제주는 휴양지였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제주도에 가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이 많았을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조선시대 중앙의 양반들에게 제주도는 그야말로 야만의 땅이요, 혼돈의 땅이었다. 제주도는 고려시대 몽고 지배 시기부터 유배지로 이용됐다. 조선왕조 500년동안 200명 가량의 유배객들이 제주에서 생활, 유배인의 수에 있어 단연 으뜸이었다. 제주 목사가 근무한 관청에는 아예 '서울을 향해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의 망경루(望京樓)가 있었을 정도였다.

'새로 쓰는 제주사'는 이 같은 중앙의 시선, 국가 중심의 한국사에 매몰돼 온 기존의 제주사에 반기를 드는 책이다. 저자는 국사와 다른 사실을 그 지역인의 시각, 즉 변방적 시선으로 기록한 지방사로서 제주사를 다시 써내려 간다. 책은 교과서에 구석기유적으로 등재됐다가 슬며시 사라진 제주 빌레못동굴의 사연에서부터 4·3사건에 이르기까지 통사에 걸쳐 12개 주제로 제주사를 서술한다.

탐라가 고려 태조(938년)에 복속된 이래 제주인은 경계인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륙과 해양의 경계지인 제주의 지정학적 특성 상 대륙과 해양의 두 세력은 제주를 유리한 거점으로 확보하기 위해 맞부딪혔다. 몽골 침략기 강화도로 옮긴 고려 정부가 한 때 제주 천도를 고려했던 것이나 삼별초가 굳이 제주를 선택한 것도 제주가 해양으로 열린 요충지이기 때문이었다. 몽골제국이 남송과 일본 정복의 전초기지로 지목한 곳도 제주도였다. 제주인은 탐라에서 고려로, 몽골의 지배와 왜구의 침략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경계인으로서 제주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는 고려 무신정권 때 몽고의 지배에 반대해 제주를 중심으로 1270년부터 3년간 항몽투쟁을 벌였던 삼별초의 난과 공민왕의 반원(反元) 정책이다. 흔히 자주성의 상징으로 기술되는 삼별초의 난이지만 제주 사람들에겐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온 것 자체가 재앙이었다. 고려의 지방 관리들에게 수탈 당해온 제주민들에게 삼별초도, 몽골도 심지어 고려도 모두 외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동안 고려정권이 파견한 관리의 착취가 워낙 심했기 때문에 삼별초의 편을 들어 그들에게 오랫동안 근거지를 제공했다.

그후 원이 고려를 지배하면서 정착한 많은 몽고인들을 목호(牧胡·오랑캐로서 말을 키우던 자)라고 불렀다. 공민왕은 명(明)의 요구에 따라 목호들이 키우던 말을 징발하려 하자 이들은 '목호의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당시 제주인들은 정부군이 아니라 목호의 편이었다. 목축, 건축, 양잠, 직조 등 많은 선진문물을 전해주었을 뿐 아니라 이미 상당수 혼혈이 이뤄졌기 때문. 결국 이들은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최영 장군에 의해 처참히 진압됐다. 이 사건은 '간과 뇌는 땅을 가렸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로 현대사 4·3 이전의 최대 학살사였다.

제주의 무속 신앙도 마찬가지다. 제주에는 무려 346개의 신당이 살아있으며 국내 어느 지역보다 풍부한 신화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1만8천 신들의 내력을 담은 여러 신화 가운데는 '천지왕본풀이'라고 하는 천지개벽 신화까지도 존재한다. 개벽신화를 간직한 지역은 제주도와 한반도 북부지방 일부를 제외하곤 국내에선 사실상 거의 없다. 세계적으로도 흔한 편이 아니다. 제주도의 창조여신인 설문대할망은 옥황상제의 셋째 딸로 덩치가 굉장했다. 그녀가 흙을 몇 번 날라다 만든 것이 한라산이며, 이 흙을 나르던 중 터진 치마 사이로 떨어져 굳은 흙덩이가 제주도 전역에 퍼져있는 오름이다. 성산 일출봉은 그녀가 빨랫감을 놓았던 빨래 바구니이며 그 앞의 우도는 빨래판이었다고 전해온다.

이 책은 제주 역사기행 안내서가 될 만하다. 책을 읽다 보면 기원전 선사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역사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다. 12개 주제를 답사코스로 하고 본문을 가이드 삼아 실제 답사를 해 보는 건 어떨까.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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