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쇼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패션 디자이너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패션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은 부부가 함께 일하는 경우가 흔하다. 직장과 가정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디자이너 부부들의 삶은 어떠할까. 지역 패션계에서 금실이 좋기로 소문난 두 부부를 만나보았다. 묘하게도 두 쌍 모두 아내가 한 살 위인 커플들. "젊은 남편과 사니 능력 좋다"는 소리를 일찍부터 들어온 50대, 30대 두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김두철·이상순씨
"알콩달콩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만날 싸우는데…."
디자이너 캐릭터 브랜드인 'K.D.C.깜'을 이끌고 있는 (주)대경물산의 김두철(55)'이상순(56)씨 부부. 잉꼬 부부라는 말에 웃으며 손사래를 저었다. 전국 23개 백화점에서 연 매출 120억 원 규모의 경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남편 김두철 대표, 디자인실장 겸 기획감사로 1층부터 5층까지 사무실 계단을 쉴새 없이 쫓아다니며 품질을 책임져야 하는 아내 이상순씨가 매일 싸운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래도 부부 싸움이 그리 험악해(?) 보이지 않는다.
주위 의식도 않고 "XX" 욕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남편을 보고 "급할수록 더 심해져요"라며 웃어 넘기는 아내 이씨의 모습은 천생연분이 따로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1975년 12월 대구 중구 동문동에 하이패션 '깜'을 오픈할 당시만 해도 이 부부는 무지 많이 싸웠다고 한다. 서울에서 재단을 제대로 배운 남편 김씨와 디자인을 하는 아내 이씨가 서로 호흡을 맞추려니 처음 5년간은 많이 싸울 수밖에 없었단다. 이렇게 부부가 함께 일한 지 30년째. 서로 눈빛만 봐도 마음을 읽을 정도로 통하는 부부이자 동지다.
"옷은 첨단으로 만들지만, 사는 건 아주 옛날 식으로 지냅니다." 모두들 편리한 아파트를 찾는 세상이지만, 이 부부는 결혼해 줄곧 한옥 집을 고집해 왔다. 낡은 부엌만 고쳤을 뿐 커다란 둥근 나무기둥이 참 보기 좋아 집을 뜯을 생각도 못 하겠단다.
세 아이를 둔 이 부부는 집안에 형제가 많은 점도 닮았다. 종갓집 장손인 남편 김씨는 친척까지 더하면 동생이 16명이나 된다. 그런 김씨가 처갓집 11남매 중 5번째 사위가 됐으니 자신의 고향인 대구와 아내의 고향인 경북 영양의 전통을 이어가는 집안이라고 자랑할 만하단다. 회사 이름인 대경물산도 대구와 경북에서 크게 경사스럽게 물건을 사고 판다는 뜻을 담았다고.
김씨는 아내 이씨를 두고 "우리 집사람 같은 사람 없다"고 자랑이 늘어진다. 옷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보통 사람의 4, 5인분 역할을 떠맡고 있는 '한국형 아내'이기 때문이다. 명절까지 1년에 지내는 제사가 10번. 음식 솜씨가 좋은 아내 이씨는 제사 음식도 2, 3시간 만에 후딱 만든다. 김씨는 "남이 만든 음식은 젓가락질도 못 하겠다"며 "평생 술을 그리 많이 마셔도 건강을 안 다치고 젊은 사람과도 밤새도록 술을 마실 수 있는 것도 아내의 건강 식단 때문일 것"이라고 자랑한다.
아내 이씨는 평생 동안 미장원에 가서 파마 한 번 한 적도 없다. 여유 있게 미장원에서 파마할 시간도 없었거니와 남편이 '머리 볶은 여자'를 안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긴 생머리를 뒤로 묶고 젊게 옷을 입는 이씨의 스타일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패션 일을 하려면 얼마나 전력투구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일요일에도 아이디어 구상을 위해 조용한 사무실을 찾는 아내 이씨, 일 관계로 골프를 치는 것 말고 개인적으로는 군대동기 모임밖에 하지 않는다는 남편 김씨. 이 부부는 요즘 30, 40대 여성을 겨냥한 세컨 브랜드 'DE/BY'의 본격 출범을 위해 정신없이 바쁘다. '5월의 토요일'처럼 따뜻하고 여유로운 잔잔한 일상으로부터 새 브랜드를 출발시킨다는 뜻을 담았지만, 이 부부의 실생활은 한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전쟁터나 다름없어 보였다.
◇ 곽병진·이경미씨
'한 쌍의 바퀴벌레(?).'
(주)아자리에를 이끌고 있는 곽병진(34)'이경미(35)씨 부부는 가끔씩 지인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는다.
애들을 재우고 한밤중에 일어나 베란다에서 싸우기 때문이다.
"애들 앞에서 싸우면 안 되잖아요." 당시에는 참 심각한 문제였는데 시간이 흘러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온단다. 부모의 가업을 이어받아 50대 여성을 위한 정장라인인 아자리에 브랜드를 이끌어온 곽병진 대표. 토목과를 다니면서도 복장학원에서 패션 디자인을 배워 결국 디자이너가 된 그는 우연찮게도 소개팅에 친구를 대신해 나갔다가 아내 이씨를 만나게 됐단다. 의류학과를 나온 이씨는 디자인실장으로 남편과 함께 일하다 보니 싸울 일도 많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30대 커리어우먼을 위한 새로운 라인을 준비하고 있는 이 부부는 "부부가 같이 디자인을 하지만 서로 보완해 주는 역할을 잘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엉망이 된다"고 했다.
문제는 직장에서 싸운 게 가정까지 이어지는 부분. 직장에서도 언성을 높이면 직원들이 '부부싸움'으로 보는 것도 곤란한 점이란다. 일하는 욕심이 서로 뒤지지 않는 이 부부는 한 쌍의 바퀴벌레처럼 바깥 일과 집안 일을 알아서 척척 해내는 모습이 주위의 부러움을 살 만하다.
"남자 일, 여자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잖아요?" 청소, 빨래, 설거지, 아이들을 돌보는 일까지 남편, 아내 역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부부. 신세대형 젊은 부부의 전형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일찍 자는 아내 이씨와 달리 야행성이어서 새벽 2시나 돼야 잠자는 남편 곽씨. 출근 준비도 해야 하고 아이들 학교 갈 준비도 해줘야 하는 이 부부는 서로 할 일을 알아서 나눠 한다. 아내가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설거지하는 동안 남편은 이불 개고 큰 애 준비시켜 학교 보내 주고 작은 아이를 위해 젖병 소독도 한다.
"어차피 혼자 살면 남자나 여자나 혼자서 다 해야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이 부부는 남녀 성별을 가릴 게 아니라 서로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좋은 것 같다고 말한다.
"설거지, 청소 등 집안 일을 해보니까 힘이나 속도 면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더 나은 것 같아요. 여자가 세세하게 구석진 곳까지 깨끗하게 잘한다면 남자는 속도가 빨라 외출 시간 전까지 끝낼 수 있거든요."
요즘 젊은 남자들은 당연히 아내와 같이 집안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남편 곽씨는 아내도 원하는 부분이 있으면 당당하게 요구한다고 말한다. "함께 디자인을 하지만 조금씩 취향이 다른 것 같아요."
정확한 시장 정보를 바탕으로 기획해 상품으로까지 연결시키는 스타일인 남편 곽씨. 하지만 아내 이씨는 감각이 남편보다 훨씬 더 앞선다고 했다. 외식을 할 때 아내 이씨는 한국적으로 푸짐하게 맛난 음식을 차려내는 식당을 좋아하는 실속형이지만, 남편 곽씨는 우선 눈으로 보기 좋게 담아내는 음식을 좋아하는 분위기형이란다. 그래서 외식 값도 더 많이 든다고.
"아내는 이미 고급스런 분위기가 돼 있는데 제가 좀더 노력하고 있습니다." 올 가을에 출범시킬 새 브랜드의 이미지에 맞게 한 달 반 만에 살을 7㎏이나 빼고 머리도 기르고 있다는 남편 곽씨. 새 브랜드의 이미지를 심어주려면 자신부터 브랜드화 돼 있어야 한다는 이 부부는 천생 디자이너 부부인 것 같다.
김영수기자 stella@imaeil.com
사진: 김두철·이상순씨 (사진 위쪽)·곽병진·이경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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