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 책의 위기

입력 2005-01-13 15:00:44

몇 해 전 타계한 대학 은사는 강의 교재가 팔리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은퇴 후 저작권 수입을 고려해 저술한 취직시험용 교재조차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이러한 현상은 인터넷이 확산된 이후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대학 교재나 취직수험서가 이 지경인 터에 인문서나 일반 교양서적 시장이 형성될 리 만무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3년 신간서적 발행은 1997년에 비해 58.6%나 줄었다. 특히 사회과학과 인문학 분야가 큰 폭으로 급감했다. 반면 만화나 실용서는 오히려 발행부수가 늘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지적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다.

이공계 위기를 걱정하는 사람은 많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도 적지는 않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공계 위기에 대해선 그 후유증과 파장을 걱정하지만 인문학 위기의 심각성을 우려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과학기술 시대에 이공계는 국가경쟁력 의 원천이라는 측면에서 그 위기를 피부로 느끼지만 인문학은 당장 먹고사는데 필요한 학문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은 대학 지원경향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많은 우수 고교생들이 법과대학과 의과대학을 우선 지원하는 반면 공과대학과 인문사회과학대학은 후 순위로 밀려났다. 사법시험 합격자 수가 늘면서 '앰뷸런스 체이서(Ambulance Chaser)'-교통사고나 쫓아다니는 3류 변호사-로 전락할 변호사가 적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대기업 지원자 중 수많은 사법시험 합격자가 탈락해도 법과대학 선호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의사들도 "요즘 의과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바보"라며 의료진의 대량 배출로 의사직의 메리트가 사라진다고 충고하고 있다. 그래도 '의과 대학 신화'는 올해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추세다. 아무리 변호사와 의사의 '값'이 떨어져도 먹고살 수는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외환위기 이후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를 도입하면서부터 더욱 심화됐다. 기업들이 구조조정이란 미명아래 이공계 연구원들을 대거 길거리로 내몰면서 이공계 기피현상이 보편화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은 외면당하게 돼 있다. 아무리 심오한 지혜와 학문을 지녀도 그 지식이 시장에서 거래될만한 가치가 없으면 시장은 냉혹하게 퇴출시켜 버린다.

과연 인문학은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영화나 첨단IT분야에서, 특히 게임 및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없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출판에서 대성공을 거둔 뒤 영화 분야로까지 확장돼 히트한 대표적 사례는 '해리 포터'시리즈와 '반지의 제왕'이다. 미국 할리우드의 경쟁력도 책에서 비롯됐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할리우드 영화배우의 대부격인 할리우드 명예시장 자니 그랜트도 "하루 일과 중 30~40%의 시간을 책읽기에 할애하지 않으면 이 곳에서 버틸 수가 없다"고 말한다.

1998년 일본 반다이 사의 게임으로 출발한 디지몬은 만화잡지, TV애니메이션,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선보인 뒤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100여종이나 되는 캐릭터 상품을 내놓는 '대박'을 터뜨렸다. 디지몬 탄생의 실질적인 주역인 반다이 사의 한 외주제작업체 직원들이 기발한 아이디어와 기획력을 얻은 원천은 바로 책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아이디어의 창출은 곧바로 그 나라 산업의 경쟁력으로 연결된다. 지식 창출과 아이디어 개발의 힘은 끊임없는 책읽기에서 나온다. 인문학도도 과학서적을 읽어야 하고 과학도도 문학서적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어떤가. 인문교양서 출판사들은 고작 3만 명으로 추산되는 '열성 독자'들 때문에 겨우 굴러간다고 말한다. 책이 팔리지 않으니 책값이 비싸질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독자가 더욱 줄어드는 '빈곤의 악순환' 고리에 빠지게 된다. 이에 따라 베스트 셀러 기준도 종전의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인문학 서적은 초판 1천부도 찍기 어려운 상황으로 갔다. 지식기반사회에서 책을 읽지 않는 추세가 계속된다면 이미 국가경쟁력을 상실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영화, 게임 등 문화산업 분야에서 불고 있는 한류 열풍도 그 효과가 지속될지 미지수다. 한류 열풍이 일본과 중국, 동남아를 휩쓸고 있지만 지금처럼 인문학의 위기와 책의 위기가 계속될 경우 열풍은 태풍으로 계속 확산되지 못하고 열대성 저기압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다. 한류를 확산시킬 아이디어가 고갈되는 상황에서 양질의 디지털 콘텐츠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한류열풍도 인문학적 상상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국내 인문학 위기의 위험신호는 이미 곳곳에서 감지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아이디어 고갈로 참신한 아이디어 개발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지만 국내에선 구할 수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찾는 것이 외국의 북 사이트다.

지난해 극심한 불황에 허덕였던 우리 출판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미국 작가 댄 브라운의 팩션(fact+fiction)-사실과 허구를 교묘히 섞어 구성한 소설- '다빈치 코드'였다. 이 책은 예수의 신성을 모독했다고 해서 개신교계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영화화를 미리 염두에 두고 쓴듯 속도감 있는 전개와 교양을 적당히 버무려 베스트 셀러가 됐다. 국내 소설들이 읽히지 않는 상황에서 외국 소설이 베스트 셀러가 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내 작가들의 분발을 요구해야겠지만 우리의 상상력이 고갈되는 징후는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인문사회과학 시장의 전성기는 1970~1980년대였다. 군사정권 시절 공안당국이 '금서 목록'을 신문지면을 통해 발표하면 당시 대학생들은 몰래 구입하거나 조악하게 편집된 복사본까지 사서 읽었다. 유신과 5공의 얼음장을 들추고 민주화를 이끌어 낸 세력도 이 '금서'를 읽은 이들이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층과 학생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책 대신에 즐길 게 너무나 많고 오로지 '좋은 대학' 진학이란 지상목표에 매달려 책 읽을 시간이 없는 탓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출판계의 위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문화적 재앙으로 확산될 수 있다. 사회 각 분야에 문화콘텐츠를 제공해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는 인프라가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우리 선인들은 돈이 가득한 금고보다 책이 빼곡한 서재를 가지라고 권했다. 우리가 '문화 강국'이 되고 '문화 국민'이 되는 것이 책 읽기에 달려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조영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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