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편지-'점수만능' 집단최면

입력 2004-12-27 11:21:54

최근 발표된 학업 성취도 국제 비교(PISA) 결과를 둘러싼 논란이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한국의 고1 학생들이 문제 해결력 1위, 읽기 2위, 수학 3위, 과학 4위인 것으로 조사됐다는 결과는 침체돼 있던 교육계에 흥분과 기대를 던져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교육부와 교육과정평가원 등은 "한국 교육이 더 이상 암기식'주입식이 아니라 창의력과 독서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평준화는 결코 실패한 정책이 아니다", "사교육은 우리만 심한 게 아니므로 공교육의 성과다"라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반면 평준화 반대론자를 비롯한 상당수 교육 전문가들은 수학에 대한 흥미와 동기가 최하위권이고 상위 5% 학생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점 등을 들어 평가 절하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주고받는 공방을 보는 마음은 씁쓸하다. 누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 정부와 많은 교육 전문가들, 언론들이 평가 점수에 매달리는 모습은 자녀의 시험 점수에 울고 웃는 학부모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이른바 점수 만능이라는 집단적 최면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오늘은 2005학년도 대학입시 정시모집 원서 접수가 마감되는 날이다. 고교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올해도 자연계 상위권 수험생들은 의약계열 선호 일색이고, 인문계는 여전히 법'상대 중심이다. 상담은 적성이나 장래 희망과는 무관하게 철저히 점수에 맞춰지는 게 보통이다. 난치병을 정복하는 의료인이 되겠다거나 존경받는 법조인이 되겠다는 이야기는 없다. 고교 1학년 때 보인 세계 최상위권의 점수는 의대나 법대에 지원 가능하나로 결론이 나고 마는 것이다.

PISA 결과가 나온 뒤 세계 각국이 보이는 다양한 반응 가운데서도 단연 관심이 가는 나라는 독일이다. ISA2000에서 하위권 점수를 받는 독일은 교육 제도를 손질하고 투자를 늘리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여전히 중위권을 벗어나지 못해 충격에 휩싸인 분위기다.

그 속에서 일부 교육 관계자들이 던지는 비판은 의미심장하다. 아시아 국가들의 성적이 좋은 것은 집단적'획일적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반박하는 우리 학자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굳이 독일을 언급하는 것은 독일이 결코 실패한 교육을 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슈타이너 학교다. 1919년 독일에서 처음 설립된 슈타이너 학교는 유럽과 아프리카, 일본 등 세계 각국으로 번져 1992년엔 무려 582개로 늘어났다. 점수와 등급에 따른 학생 선발 거부, 형식적인 수료 기간 비판, 부모와 학생들을 배제하는 공립 학교 행정에 대한 거부 등과 같은 요인들이 슈타이너 학교의 성공 이유다.

12년 동안 성적에 의한 평가가 전혀 없지만 독일의 이 학교 출신들은 공립학교 출신 학생들보다 두 배나 더 많이 대학에서 공부한 것으로 나타난다. 12년 동안 오로지 성적만으로 평가해 고작 의대와 법대밖에 선택할 줄 모르는 우리 학생들과는 너무 차이가 난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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