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순수시의 대명사' 金春洙

입력 2004-11-30 13:00:00

'순수시의 대명사' 김춘수(金春洙) 시인은 '무상의 관념'의 풍경적 묘사에 액센트를 찍으면서도 평생 변모를 추구한 '타고난 언어예술가'다. '의미→무의미→의미'의 궤적에도 언어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차단, 그 자체를 '절대화'하는 '순수시'의 입장을 고수했다. 널리 애송되는 시 '꽃'은 존재에 대한 인식의 세계를 아름답게 떠올리면서 사물 그 자체와 함께 존재의 심연이 이르려 하는가 하면, 스스로 '사물화'됨으로써 형이상학적 인식의 공간을 열어 단연 우리시단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 매김했었다.

○…'나'와 '너'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가 이뤄질 때 '꽃'을 볼 수 있음을 암시하는 시 '꽃'은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한 추구가 명제다. 대상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그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깨달음의 세계를 부각시킨 셈이다. 그래서 시인은 마침내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달라는 소망을 간절하게 토로하기에 이른다.

○…그가 되고 싶은 '꽃'은 마지막 두 줄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의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다. 또한 마지막 연에 등장하는 "우리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에서의 '무엇'은 바로 '의미 있는 존재'로 볼 수 있어 시인의 간절한 '존재론적 소망'을 담고 있다는 풀이를 가능하게 한다.

○…시인은 한동안 '무의미 시'(의미 또는 사상이나 관념의 흔적들을 지운 시)를 시도했다. 어떤 정경을 그대로 서술만 하면서 관념의 설명이나 이미지의 비유성을 비껴 서려 했다. 입체적인 이미지들이 내면화되고 주관화되는가 하면, 때로는 비현실적인 정경 묘사로 아주 낯선 서정(심리적으로 굴절된 정경)의 세계를 떠올렸다. 이 때문에 그의 시는 의식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내면성에 기울어지는 모습이었다.

○…그는 결국 '무의미'에서 '의미'로 돌아왔다. 순수'객관을 지향하면서도 관념을 유추하거나 굴절과 조합'파괴에 의해 조성되는 '내부의 관념 투영'과 '의식의 떠올림'에 힘을 기울이면서,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도 왕성하게 순수시의 금자탑을 쌓았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넉 달 동안 투병하다 어제 82세를 일기로 낯선 세계에 들었으나 '순수시의 대명사'로 길이 빛나기 바라며, 삼가 명복을 빈다.

이태수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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