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직필의 외길 걸은 夢鄕

입력 2004-11-18 12:01:56

온몸으로 不義맞선 한국언론'자존심'

몽향(夢鄕) 최석채(崔錫采) 선생은 한국 언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정론직필'의 표상이었다.

독재 정권에 항거한 지사이자 민주 언론의 기수였던 그는 어떠한 권력과 금력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 평생 참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1917년 11월 21일 태어난 최석채는 경북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가 본적지로 김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부친을 따라 일본으로 간 그는 일본 나고야 중고법률전문학교와 일본 중앙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1942년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법제'의 편집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해방 후 대구에서 발행된 잡지 '건국공론'의 편집부장을 거쳐 1946년 '부녀일보' 편집국장을 맡았다.

그는 여기서 최초의 필화를 겪는다.

경찰들이 한 신문사 기자를 집단 폭행한 사건을 두고 '완연 테러단 같은 경찰행동'이라는 기사를 썼다가 경찰에 구속된 것. 그는 불법 감금임을 주장한 12개 항목의 소청을 내고 2주 뒤에 풀려났다.

1949년 일제 고등계 형사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경찰에 투신한 그는 1952년 5월 부산에서의 개헌 파동을 듣고 경찰직을 내던지기까지 성주·문경·영주 경찰서장을 역임했다.

1955년 2월 '대구매일' 편집국장이 된 그는 같은 해 5월 주필이 됐다.

그는 4개월 뒤 한국언론사에 빛나는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를 쓰고 두번째 필화를 당한다.

자유당 정권이 정치 행사때마다 학생들을 동원하는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한 이 사설로 신문사는 백주에 테러를 당하고 최 주필은 30일 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법정투쟁 끝에 1956년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자유당 정권의 계속된 압력으로 1959년 결국 퇴사했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 3·15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사설 '호헌 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를 비롯해 '국민이여 총궐기하자' 등 명논설을 잇달아 집필하며 독재 권력의 횡포에 강하게 저항했다.

1964년 언론윤리법 철폐 투쟁의 상임위원으로 신문 편집과 언론 자유 획득에도 적극 앞장섰고 경향신문 편집국장·회장,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 경영교육재단 이사장, MBC 회장, 한국방송회관 회장, 아시아신문재단(PFA) 한국위원회 회장 등을 지냈다.

만년에는 대구매일신문 명예회장과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는 한편 1982년부터 6년간 매일신문에 '몽향칼럼'을 집필하며 언론 발전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 1991년 4월 11일 서울 응암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한국 언론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은 그는 1977년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김천·이창희기자 lch888@imaeil.com사진: 19일 오후 김천 직지문화공원내에 건립, 제막될 몽향 최석채 선생의 기념비(왼쪽)와 사설비. 오른쪽은 기념비 후면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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