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대구내복'파이팅!

입력 2004-11-11 09:11:36

하루하루 쌀쌀해지는 이맘때, 30대 이후 세대라면 잊을 수 없는 '옷'이 있다.

내복이다.

품질 좋은 외투가 없던 시절, 내복은 겨울나기의 필수품이었다.

끝을 모르는 불경기에다 유가 폭등에 따른 에너지 위기감. 일부 단체에서는 과거로 돌아가자며 '내복입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실제 입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지…. 33년 동안 줄곧 내복을 만들어온 '내의업계의 산 역사'를 만났다.

"천직이라 생각 안 했으면 진작에 그만뒀겠죠."

대학1년을 다니다 중퇴, 1971년 내의업계로 뛰어들었다는 김태학(49·사진) 대창섬유 대표는 이렇게 첫마디를 뗐다.

"1970년대만 해도 대구 내복이 서문시장을 통해 전국 각지로 안 나간 곳이 없었어요. 굵직굵직한 공장만 대구에 300개가 넘었지. 당시만 해도 내복 만든다고 하면 잘 나가는 사업가였죠." 그 시절이 생각나는 듯 목청을 높였다.

그는 지역 내의업체가 사양산업이라는 오명을 쓴 채 지금은 40여개만 남아있다고 했다.

대창섬유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저가시장은 중국산에 밀리고 고급시장은 대기업에 뒤지는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

그러나 김 대표는 '내 일터를 버릴 수 없다'는 각오로 뛴다.

자신이 직접 발품을 팔면서 서울의 유명 할인점, 아울렛 등을 개척해 중저가 시장을 뚫어냈다.

상품의 고급화를 위해 면사보다 촉감이 우수한 모달사(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실)를 이용한 내의를 만들고 자체 디자인 개발능력도 구비, '내복 역사'를 끊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외환위기 때엔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때 깨쳤어요. 무모하게 시장을 넓히기보다 주력 시장을 잡자고. 결국 중저가 위주 타깃 마케팅을 통해 회사를 안정화시켰습니다.

제품 개발을 계속하고 우리처럼 자체브랜드(에스또냐) 홍보를 꾸준히 해 내 고객을 확보하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고속도로 같은 교통망이 변변치 않던 시절, 대구가 생산은 물론 유통까지 독점하면서 앉아서 돈을 벌던 시절도 있었다고 그는 전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전라도 익산의 쌍방울, 태창과 전주의 백양이 급성장하면서 대구 내복은 서서히 시장을 잃어갔다.

"당시엔 아크릴과 폴리에스테르로 만든 빨간 내복만 만들 줄 알면 끝이었어요. 제품 수도 얼마 안 돼 사업하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그게 화근이었죠. 먹고 살 만하니까 대구업체는 투자를 전혀 안 한데 반해, 타지 업체는 염색·가공 기술력을 꾸준히 키우고 우리가 손을 안 댄 면제품에 집중 투자한 것이 우열을 가려버렸죠."

김 대표는 요즘 내의 공장이 중국으로 다 가고 국내에는 기획과 마케팅만 하는 영업회사만 남는 추세라고 했다.

"제조와 유통이 함께 가지 않으면 결국 기술력 저하로 이어져 시장을 모조리 빼앗겨요. 최대 목화 생산국인 우즈베키스탄이 기술력 부재로 속옷과 양말을 수입에 의존하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모든 옷을 중국에 의존하는 시대가 올지 모릅니다.

"

돈만 벌려면 제조에는 손 놓고 영업만 하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그는 제조를 그만둘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경제를 받쳐 나가는 것은 제조업이라는 것.

"내의도 그렇고, 섬유업 전체가 사양 산업으로 인식되지만 여전히 희망을 버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한가지 잊으면 안 될 것이 있죠. 예전의 영광은 빨리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에요. 시장 흐름에 맞춰 오늘 새로 시작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 이재교기자 ilmare@imaeil.com사진: 내수 침체로 내의 업계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대창섬유 김태학 사장은 30여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독자 브랜드 개발 및 타깃마케팅을 통해 대구지역 내의업계의 희망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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