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마리너스 기적의 배

입력 2004-11-09 09:24:13

우리는 과거를 곧잘 잊어버리는 것 같다.

불과 반세기 전의 일인데도 까마득한 옛이야기처럼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잊어진 전쟁 6·25 전쟁'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전쟁을 직접 체험한 세대들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전쟁 중에 일어난 사건들이 기록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이 열심히 증언들을 채취하고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의 흥남 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레너드 라루 선장과 승무원들의 영웅적 이야기에 대해서 오늘날에는 아무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이야기를 그 당시 공군으로 작전에 참여했던 빌 길버트라는 분이 자료를 모아 '마리너스 기적의 배'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었고, 이를 재미 실업인인 안재철씨가 번역하여 한국민들에게 알리게 되었다.

또 그의 노력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게 되었으며, 이 사건을 기억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기념공원과 기념비 조성사업에 앞장서고 있다.

1950년 12월 23일 흥남 철수 당시 대부분의 유엔군은 이미 철수했고 도시는 적의 포화에 의해 화염에 싸여 있었다.

다가오는 대포사격과 공습으로 탈출이 매시간 위태로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비행기용 제트연료를 가득 실은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포위하고 있는 적군에 의해 생명을 위협받으며 해안에 남아 있는 북한 피란민 1만4천명 모두가 승선할 때까지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선장 레너드 라루는 선원들에게 해안에 있는 한사람의 생명도 잃지 않고 구출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독려하였다.

이리하여 선장을 포함한 47명의 선원들은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구조의 하나를 기적적으로 완수하였다.

그들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매서운 추위 속에서 용기, 지략, 투철한 승무원 정신, 인도주의적인 희생과 사랑으로 팀워크를 이루어 물도, 먹을 양식도, 의료진이나 통역관도 없는 심지어 화장실도 없는 상황에서, 적군의 포화와 어뢰를 뚫고 3일간의 항해 끝에 북한 공산정권을 탈출하여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항해도중 5명의 아기가 태어났고, 승선한 피란민 중 단 한명의 사망자도 없었던 기적적인 피란민 구출작전을 성공시켰다.

이 책을 통해 당시의 피란민들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자유와 생명과 희망에 대한 갈구를 오늘날 우리는 그 몇 만분의 일이라도 실제로 느낄 수 있을 것인가.

5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흥남부두 철수와 구조작업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금순아 잘있거라"라는 유행가의 레코드판은 오늘도 돌고 있다.

오늘날 많은 탈북자들이 자유와 생명과 희망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흥남철수와 같은 탈출을 하고 있지 않는가.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는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 모두가 1만4천명의 생명을 구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과 선원들처럼 사랑과 용기를 갖고 인도주의적인 활동을 실천해야 할 때가 아닌가.

라루 선장은 1954년부터 마리너스라는 이름의 수사가 되어 가톨릭의 성베네딕트회 뉴튼 수도원에서 2001년 10월 14일 87세로 타계할 때까지 기도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마리너스 수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저에게 옵니다.

"

그렇다.

오늘의 탈북동포와 고통 중에 있는 북한동포들에게 다시 한번 하느님의 손길이 계시길 간절히 기도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어찌하랴.손병두 전 전경련 부회장·천주교 평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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