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선생님-상산 이재수 선생님(경북대 사범대)

입력 2004-11-08 13:33:46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가르침에 힘입어 오늘까지 살아왔다.

그 가운데서도 학교를 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은 선생님들의 은혜는 말 그대로 태산 같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사랑과 정성을 쏟아주신 여러 선생님들. '그리운 선생님'이란 말에 가장 먼저 나의 뇌리를 스친 한 분. 이미 세상을 떠나신 이재수 선생님이다.

나는 시골에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가난하게 자랐다.

어머니의 눈물겨운 헌신으로 진주농림고교를 졸업하고, 마다하시는 어머니를 설득해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로 했다.

농림학교에서 배운 실력으로 농사를 지으면 어머니의 고생을 끝내드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결심한 일이었다.

여름 농사를 마치고 한가위를 지나자 어머니는 내가 농사짓고 사는 모습을 더는 보실 수 없다면서 끼니를 끊으셨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 뜻에 따라 대학 진학의 길을 찾다가 곡절 끝에 학비가 싸고, 장학금이 나오고, 졸업하면 취직이 바로 된다는 경북대 사범대로 왔다.

시골에서 자라고 농림학교를 나온 나는 대학에서 겪는 모든 일들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영남 지역은 물론 전라도, 제주도에서 모여든 친구들은 저마다 수재들이었고,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들의 지식과 인격이 모두 아득히 우러러 보였다.

상산 선생님과의 만남은 2학년 때부터. 헌칠한 키에 충청도 말씨로 아기처럼 순진한 웃음을 지으며 하신 강의는 귀에 '쏙쏙' 들어올만큼 흥미를 끌었다.

4.19 혁명이 나고, 5.16 쿠테타가 터지고, 이런 소용돌이에서 졸업을 앞두고 처음으로 선생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책을 보시다가 예고 없이 찾은 나를 맞으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더욱 깨끗하고 뜻밖에도 따뜻했다.

대학원에 가고 싶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서슴지 않고 격려를 주시며 당장 선생님 연구실에서 공부해도 좋다고 하셨다.

대학원 입학과 함께 나는 선생님 연구실에 책상을 들여놓고 도시락을 먹으며 공부를 했고, 그 때부터 선생님에게서 학문의 길을 배웠다.

선생님 연구실, 선생님 댁 서재, 남문시장 주변 막걸리 집들이 모두 내 교실이었다.

선생님은 학문밖에는 모르시고 다른 세상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셨기에 남기신 일화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어느 날 해거름 남문시장 막걸리 집에서 "사내가 세상에 나서 정치도 좋고 재벌도 좋지만 학문만큼 값진 일은 없다.

참된 학문의 성과는 영원히 살아남기 때문이다" 하신 말씀은 아직도 내 마음에 살아 있다.

그러기에 귀한 말씀을 쓸모없게 만들며 살아온 내가 부끄럽고 죄스러워 선생님이 더욱 그리워진다.

김수업(대구가톨릭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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