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사람-극장 간판 미술가 용병식씨

입력 2004-10-30 09:30:46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없다.

풍경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게 마련이다.

엊그제 가장 신기했던 것들이 오늘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것이 마냥 행복한 것일까.

열여덟 살 때부터 대구 극장가에서 영화간판을 그렸던 용병식(52)씨가 했던 일도 어찌 보면 사라져가는 아련한 추억 중의 일부분이다.

그는 지난 2002년 말 제일극장이 문을 닫으면서 대구 극장가에서 마지막으로 극장 간판을 그린 사람이 됐다.

"1990년대 후반이었어요. 딱딱한 의자가 푹신한 소파로, 찌직거리던 음향이 최신 스테레오로, 크고 작은 극장들이 대형 멀티플렉스로 몸을 바꾸면서 극장 간판은 컴퓨터 실사 출력으로 대체됐죠. 결국 많은 동료가 떠났지요."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이 길로 뛰어든 것이 벌써 30년을 훌쩍 넘겼다.

"34년이라는 세월을 극장 간판과 함께 살았어요. 지금도 영화 포스터를 보면 손이 근질근질합니다.

" 그에게 화려한 원색의 영화간판은 절세의 영웅과 미녀가 살았던 꿈의 공간이었다.

그가 처음 붓을 잡았던 30년 전만 해도 '극장 간판 미술가'는 꽤 장래성 있는 직업이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구시내에 소극장들이 하나둘씩 새로 생길 때만 해도 그는 한 달에 200만원의 수입을 올리는 고액 연봉자였다.

대구시내에만 용씨 같은 미술가들이 30여 명은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 당시 아침이면 스케치북을 든 젊은 지망생들이 극장 앞을 서성거릴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중구 도원동의 동아극장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그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던 평생의 스승 엄기동씨를 만났다.

"처음엔 수성물감, 아교 등을 물에 섞어 안료를 만드는 일이나 작업실 청소 등 잔심부름을 했지요. 막내에서 미술부장까지 위계질서가 엄격한 극장에서 주연 배우의 얼굴에 붓을 대려면 최소한 10년은 어깨너머로 배워야 했어요."

동아극장에서 그림을 배운 용씨는 아세아극장으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개봉관에서 간판을 그렸다 하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우리 극장에도 그려달라"고 주문이 쇄도했던 시절,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구시내 극장은 물론 구미, 김천까지 그의 그림이 걸렸다.

특히 김지미, 남정임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예쁘게 그려달라며 푸짐한 선물을 주고 가기까지 했단다.

영화 홍보 수단이라고는 극장 간판이 유일했던 시절이었으니. 게다가 극장 간판은 화가의 '내공'에 따라 그림도 천차만별이다.

때로 '마릴린 먼로'가 망가지고, '찰리 채플린'이 최고 미남이 되기도 하는 마술의 화폭이기 때문.

가로 4m, 세로 2m짜리 소극장 간판은 3시간 정도면 완성한다고 했다.

문제는 가로 16m, 세로 4m짜리 개봉관의 거대한 간판이다.

"아무리 빨리 그려도 3일은 족히 걸립니다.

계속 서서 작업하기 때문에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며칠은 쉬어야 할 정도로 중노동이지요." 그래서 용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림으로 아세아극장에서 그린 '쥬라기 공원'(1993)을 꼽았다.

워낙 인기있는 대작이다 보니 며칠밤을 꼬박 새며 그렸다고 했다.

회상에 잠겨있는 그에게 그림 그릴 때 선호하는 배우가 있는지 물어봤다.

"얼굴 곡선이 시원시원하고, 개성이 뚜렷한 외국 배우들이 그리기 편했어요. 그에 비해 우리 배우들은 그 얼굴이 그 얼굴이어서 그려보면 다 똑같더라고. 박노식, 허장강, 이예춘 같은 개성 강한 배우들이 좋았지요." 그는 또 "못생긴 배우보다 미남·미녀 배우는 조금만 잘못 그려도 욕을 먹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고 덧붙인다.

1990년대 초 만경관에서 대구 최초로 '실사영화간판'이 내걸린 이후, 대형 멀티플렉스가 우후죽순 극장가를 잠식하면서 용씨 같은 '그림쟁이'들이 사라졌다.

끝까지 극장 간판을 고수했던 용씨도 세월의 변화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1천여 편의 그림을 그렸다는 그는 "평생을 극장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지금도 영화계통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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