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농업-(중)쌀농사 잇단 포기

입력 2004-10-28 10:11:45

"정부가 벼수매를 하지 않겠다는데 별수 있나요. 직접 들고 다니며 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달리 방법이 없잖습니까. 정부는 물론이고 국회도, 언론도, 수입쌀을 사먹는 도시사람들까지 모두 원망스럽습니다.

"

영천시 신녕면 정수할(56)씨는 요즘 1만여평에 달하는 자신의 논에서 '마지막 벼'를 수확하고 있다.

그가 '마지막'을 강조하는 것은 내년부터는 벼농사를 짓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정씨는 대대로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온 토박이다.

올해 전체 벼수확량은 500여포대를 넘지만 면사무소를 통해 할당받은 수매량은 196포대가 고작이다.

콤바인의 탈곡 구멍에서는 잇달아 나락이 쏟아져 내렸지만 그는 '애물 덩어리'라고 했다.

"내년부터는 우리 식구 양식을 충당할 만큼만 쌀농사를 지으려고 합니다.

논이라도 팔리면 좋으련만…." 정씨는 "평생 일군 옥답을 내년부터 묵혀야 한다는 걱정에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했다"면서 수박, 대파, 콩, 참깨 등 대체작물을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나마 올해는 추곡수매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대부분의 쌀 농가들과 농협미곡처리장은 올해보다 내년을 더 걱정한다.

정부가 양곡관리법을 개정, 내년부터 정부 수매를 폐지한다는 방침을 세웠기 때문이다.

산물벼와 건조벼에 대한 정부 수매가 폐지될 경우 대형 미곡종합처리장이 없는 지역의 농민들은 쌀농사를 지어도 팔 데가 없다.

이종민(67·청도군 화양읍 유등리)씨는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에서 그나마 노인들이 할 수 있는 농사는 벼농사뿐"이라며 "정부수매가 폐지된다니 앉아서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권혁규(49·영천농업경영인회 부회장)씨는 "추곡수매제 폐지는 농정(農政) 포기선언이고, 농정의 포기는 농민들을 포기하겠다는 처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권씨는 "요즘 농민들은 하나같이 언제쯤 파산신청 하러갈까를 놓고 고민 중"이라며 "농촌과 농민들을 이렇게 내팽개치면 천벌받을 것"이라며 목청을 높이다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청도군 이서·유등지구 평야는 질퍽질퍽한 땅이다.

때문에 '마누라없이 농사 지을 수는 있지만 장화없이는 안된다'는 말이 나도는 고장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벼를 제외한 마늘·양파·콩 등 다른 작목 전환은 고려할 수 없는 형편이다.

박복현(53·이서면 수야리)씨는 "벼농사에 더 이상 기대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며 "추곡수매가 인하에 이어 내년부터 정부수매도 없어진다니 농사를 포기해야 하는데 배운 것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이어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농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박영주(56·이서면 수야리)씨도 "양식 농사만 남겨 놓고 벼농사를 포기해야겠다"며 "농민들의 생계도 보장하지 않는 정부의 무책임 농정에 화가 나서 못견디겠다"고 울먹였다.

벼농사 1만5천평을 짓는 농업경영인 박지훈(33·봉화군 봉화읍 화천리)씨는 "배운 게 농사밖에 없어 추곡수매를 중단한다해도 설마 죽기야 하겠느냐"며 당장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내년부터 일부 농지는 밭작물로 대체해야 하겠지만 정부수매가 없어지면 상인들의 농간으로 쌀값이 하락해 농민들만 피해를 당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대부분 농민들이 봄에 영농자금을 대출받아 가을에 상환했으나 내년부터 정부 수매나 일괄 판매가 불가능해지면 농자금 상환에도 어려움이 따른다"고 주장했다.

농민들의 벼농사 포기가 속출하면 정부보조금을 받아 운영해 오던 육묘공장도 피해를 입는다.

지난해 사업비 1억여원을 들여 육묘공장을 설립한 박춘기(37·봉화읍 도촌리)씨는 "당장 피부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만약 벼농사를 짓는 농가가 줄어들게 되면 육묘공장도 상당한 타격이 올 것 같다"며 걱정했다.

이 달 들어 경북도내 시·군별로 2004년산 산물벼에 대한 수매가 일제히 시작됐다.

그러나 지역별로 다소 차이는 있지만 쌀 생산량이 지난해보다 많게는 20∼30% 정도 늘어난 것으로 잠정 집계되면서 시중 쌀값이 하락세를 보여 농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다.

게다가 산물벼 수매가 지역별로 뜰쭉날쭉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농민들은 앞으로의 쌀값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정부가 올해 추곡 수매량을 지난해와 동일하게 결정한 데다 수매가는 4% 내린다는 방침을 세워 시중 쌀값이 폭락하지 않을까 농민들은 노심초사하고 있다.

김대환(35·봉화읍)씨 등 농업경영인들은 "정부수매가 중단되고 농협 수매량마저 줄어들 경우 상인들의 벼 매입 비중이 크게 늘어 산지 쌀값이 크게 하락할 우려가 있다"며 "농협이 수매량을 늘리도록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쌀 생산과 유통을 총괄할 수 있도록 RPC(미곡종합처리장)나 농협을 통폐합해 쌀 생산과 판매창구를 단일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농협수매량은 전체 쌀 생산량의 30%대에 머물러 시장가격 교섭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정출·정창구·마경대기자

사진 : 평생 지어온 벼농사를 내년부터 포기하기로 한 정수할씨가 영천시 신녕면 자신의 논에서 어두운 얼굴로 '마지막 벼'를 수확하고 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