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파업 두달째 "나도 할 말 있다"

입력 2004-09-20 13:33:02

20일로 대구지하철 파업이 2개월이나 됐다.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는 파업. 이에 대해 파업에 참가한 노조원, 비상 근무자,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파업 참가 노조원

"시민들께 너무 죄송합니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늦었지만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상생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

파업에 동참하고 있는 노조원 이모(34)씨. 이씨는 파업 이튿날 아내가 유산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아내와 함께한 시간은 고작 반나절. 그는 유산한 아내를 남겨두고 동료들이 기다리는 파업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씨는 파업장으로 가는 길 내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웃으면서 돌아오라는 아내의 말을 되뇌며 힘을 얻었다고 했다.

"아내의 바람대로 웃으면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

그는 또 두 달 째 봉급을 받지 못해 마이너스 통장으로 근근히 생활해가고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얼굴 볼 낯도 없다고 했다.

다음달에는 4년간 들었던 보험을 해지, 부모님과 친척들에게 빌렸던 돈을 갚을 계획이라는 것.

이씨는 "파업에 참가하고 있는 노조원 모두가 경제적 어려움과 가족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며 "대구지하철은 나의 젊음을 쏟은 곳이고, 결혼과 가정을 만들어 준 삶터인 만큼 힘들더라도 시민 안전과 근로조건 개선 등 정당한 요구를 모른 척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아들의 돌을 맞은 박모(33)씨의 마음도 착잡하다.

가족이 중요하지만 동료들에게 미안해서라도 집으로 가지 못했다.

그는 "부모상을 당한 동료들도 있고 파업 중에 결혼하고도 신혼여행조차 가지 못한 동료도 많은데 나만 가족을 돌볼 수는 없다"며 "아들을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동료들과 함께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또 사 측에 대한 배신감이 한계를 넘었다고 했다.

무리한 요구도 아니고 다른 도시와 비슷하게 맞춰달라는 데도 동료를 직위해제시키고 '떼만 쓰는 노동자'로 여론에 부각시키는 사 측에 모욕감마저 느낀다는 것. 그는 파업에서 이탈한 동료들도 있으나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또 파업이 부당해서 이탈한 조합원은 한 사람도 없는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그는 "파업이 언제 어떻게 마무리되는가도 중요하지만 삶터를 잃을 수는 없는 만큼 건전한 기업문화가 정착될 때까지 투쟁할 것"이라며 "시민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표현할 길 없으나 조합원들의 정당하고 소박한 바람을 이해해주셔서 조금만 더 참아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파견 역무원 및 복귀 노조원.

"지금의 비상체제가 하루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습니다.

"

지하철 파업이 초장기화되면서 비상근무에 투입된 직원들의 고충도 이만저만 아니다.

과중한 업무는 물론 시민들을 대하기도 힘들고, 파업에 참가한 조합원 사이에서의 입장도 난처하다고 했다.

본사에서 역사 매표소로 파견된 김모(여)씨는 요즘 승객 대하기가 겁이 난다고 했다.

파업이 길어질수록 화를 내거나 욕설을 하는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 비상 근무만 해도 힘에 부치는데 시민들의 못마땅한 시선까지 감당하다보니 스트레스를 배로 받고 있다고 했다.

또 노조 편도, 공사 편도 들 수 없는 상황이어서 입장도 난처하다고 했다.

김씨는 "시민들은 지하철 운영이 제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장의 비상근무자들은 조금씩 곪아가고 있는 상태"라며 "현재 근무하는 역만 해도 파업 전에는 18명의 직원이 6명씩 3교대로 일을 분담했는데 현재는 5명의 직원이 모든 업무를 전담하고 있다"고 했다.

가정 생활도 내팽개친 상태다.

특히 맞벌이 부부의 이중고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 살림은커녕 어린 자녀들 챙기기에도 역부족이라고 했다.

"밤 10시쯤 어린이집에서 애들을 데려오는데, 갈수록 아이들의 투정이 심해지고 남편도 이제는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며 "같은 매표소에서 근무하는 남자 직원은 24시간 맞교대 근무여서 여자인 나는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파업에 참여했다가 복귀, 역무 근무를 하고 있는 한 조합원의 경우도 죽을 지경이다.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다보니 생활리듬이 엉망이 됐다.

너무 힘들고 피곤해 쉬고 싶은 마음밖에 없고, 근무를 마치면 녹초가 돼 집에 들어가자마자 잠에 빠져든다는 것. 이 때문에 제사, 생일 등 집안일과 아이들을 챙길 여유가 없어 미안한 마음에 가족들 대하기도 힘들다는 것.

그는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들고 말 못할 사정도 있어 조기에 복귀했으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파업의 정당성에 대한 소신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노조의 요구에는 다소 무리함이 있는 만큼 이제라도 파업 사태 해결을 위해 대화 가능한 수정안을 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파업이 길어지면서 파업 참가자나 복귀자 모두 힘든 만큼 빨리 마무리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시민반응

"파업을 하고 있는 게 맞긴 맞습니까."

출퇴근 때 지하철을 이용하는 조현수(47'대구 달서구 상인동)씨는 파업 중이라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지하철의 배차간격이 다소 길어지기는 했지만 시간만 잘 맞추면 이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 처음엔 배차간격에 적응이 안되고 복잡해 짜증나고 불편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요즘은 시간 맞춰 나오기 때문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텅빈 객차를 탔을 때 느끼는, 왠지 모를 애닮픔이 사라지고 좌석이 꽉차는 모습에 '이제 진짜 지하철같다'는 흐뭇함까지 느낀다고 했다.

조씨는 "사실 공사 얘기를 들으면 공사 얘기가 맞는 것 같고, 노조 얘기를 들으면 노조가 맞는 것 같아 혼란스러워 더 이상 따져보지 않기로 했다"며 "노사의 잘잘못과 현실적인 불편을 떠나 지역의 대표적인 공기업의 노사가 시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달 동안이나 싸우고 있는 것 자체가 화가 나고 짜증난다"고 했다.

이철(52'경남 밀양)씨도 "사업차 대구를 방문했지만 파업 분위기를 전혀 못 느꼈다"며 "대구의 지하철 이용률이 낮다고 들었는데 이 때문에 파업이 길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파업 장기화에 따른 불편을 호소하며 불만을 터뜨리는 시민들도 적잖았다.

김태봉(64'대구 중구 남산1동)씨는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아 역사 내부가 너무 더운 데다 열차를 놓칠 경우 기다리는 시간도 길어져 짜증이 난다"고 했다.

최강희(26'여'동구 신천동)씨도 "지하철 외에는 연결되는 대중교통수단이 없는데 교통카드 충전이 안되고 배차시간도 길어져 분통 터지는 경우가 많다"며 "평소 충분히 앉아갈 수 있는 거리도 서서 가야 되고 승객도 많아져 열차환경이 매우 불쾌해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아침시간 10분은 오후 1시간과 맞먹을 정도로 학생들에겐 중요한데 파업을 너무 질질 끄는 것 같아 화가 난다"고 덧붙였다.

장기 파업에 대해 노사를 질책하거나 조속한 타결을 원하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류태운(70'동구 효목동)씨는 "연봉이 4천만원에 가까운데도 파업을 한다는 것은 이미 명분을 잃은 호화로운 파업이 아니냐"며 "연간 1천만원도 못버는 사람들도 많은데 가난하고 힘없는 시민들을 상대로 이기적인 파업을 너무 오래 끄는 것 같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최주희(22'여'달서구 상인동)씨는 "친구나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이 파업한다는데 대해 강한 불만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며 "시민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노사가 이제라도 시민들을 볼모로 한 파업을 접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호준기자 hoper@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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