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문/가상르포-인조반정 현장을 가다

입력 2004-09-20 09:02:19

1623년 3월 12일(광해군 15) 광해군을 축출하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주모자는 이귀, 김자점, 김류, 최명길, 이괄 등 서인 세력이었다.

서인측의 쿠데타군이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옹립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취재했다.

-전문-

12일 새벽 거사에 참여한 쿠데타군은 700여명. 이들은 흔히 볼 수 있는 하급 병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군관 이상으로 보이지도 아니었다.

모두 건장한 체격이었고, 사태의 전말을 알고 있는 듯 목숨을 건 표정이었다.

쿠데타군은 칼과 창, 도끼로 무장했다.

갑옷을 입은 자는 많지 않았다.

오늘 밤 죽을 각오를 하고 모인 사람들이었다.

쿠데타군은 당초 예정보다 몇 시간 일찍 출동했다.

거사 계획이 누설됐다는 정보가 속속 들어왔기 때문이다.

함께 반정을 모의했던 자들 중에는 거사 계획 누출 소식에 달아난 자들도 있었다.

홍제원에 도착한 것은 새벽 3시. 현장에는 이미 500여명의 쿠데타군이 집결해 있었다.

새벽 4시가 되자 쿠데타군은 한성 북쪽 창의문(자하문)으로 달려갔다.

하품을 하거나 꾸벅꾸벅 졸던 도성 수비군 10여명을 소리 없이 살해했다.

도성 내에서 몇몇 보초병들과 부딪혔지만 큰 저항은 없었다.

창의문을 통과하자 뜬눈으로 쿠데타군을 기다리던 능양군이 부하들과 함께 나와 쿠데타군을 반겼다.

능양군은 억지로 웃었지만 달빛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훈련도감 소속 이확이 궁궐에 군사를 매복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괄과 김류는 반정 승패를 결정할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이확은 쿠데타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확은 이미 대세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했다.

쿠데타군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인정전 대조전에 이르는 문을 저항 없이 통과했다.

상당수 수비 장수들이 쿠데타군에 가담해 있었고 뒤늦게 쿠데타 소식을 접한 장수들은 달아났다.

궁궐 밖에 진을 치고 있던 훈련대장 이홍립은 궁궐 수비 병사들의 이동을 금지시켰다.

이미 쿠데타군과 말을 맞춘 것이라고 했다.

창덕궁 점령엔 피를 거의 흘리지 않았다.

쿠데타군은 쉽게 궁을 점령했지만 광해군을 체포하지는 못했다.

광해군은 도망치고 없었다.

궁궐 후원 담에 사다리가 걸쳐져 있고, 옥새가 떨어져 있었다.

급히 도망치던 광해군이 흘린 것이었다.

쿠데타군은 옥새를 주워 능양군에게 바쳤다.

능양군은 옥새를 들고 별궁인 서궁으로 인목대비를 찾아가 쿠데타가 성공했음을 알렸다.

능양군의 보고를 받은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잡아오라고 소리쳤다.

악이 스미고 앙칼진 목소리였다.

대신들은 속히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왕위에 즉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옥신각신하기를 한 시간, 인목대비는 먼저 능양군의 왕위 즉위식을 거행하는 데 동의했다.

능양군이 새 국왕으로 즉위하고, 즉위식 다음 날 전국에 교서가 반포됐다.

교서는 광해군이 동생들을 죽이고, 모후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는 패륜을 저질렀고, 강홍립을 오랑캐인 여진에 투항시키는 등 국가의 명목을 실추시킨 만큼 이미 국왕의 자격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반정의 완성을 의미하는 새 국왕 등극 절차를 신속히 완성함으로써 재반정의 싹을 자르려는 조치였다.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어 있던 광해군이 붙잡혔다.

광해군을 압송해 가는 길목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사람들은 "돈 애비야, 돈 애비야, 그 많은 돈을 거둬서 어디 썼느냐, 그 돈을 다 어디 쓰고 맨발로 걸어가느냐"고 조롱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참수해야 한다고 거듭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인조와 대신들은 반대했다.

광해군은 죽임을 당하는 대신 인목대비 앞에 꿇어앉아 36가지 죄목이 적힌 비망기를 읽었다.

인목대비를 폐한 죄, 형제를 죽인 죄, 불충한 죄, 종묘사직을 공경하지 않은 죄, 하늘을 기만한 죄, 배은망덕한 죄 등 두루뭉실하고 비슷한 말을 반복해서 읽었다.

비망기 작성에 직접 간여한 인목대비는 이 비망기를 통해 광해군을 괴롭히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은 눈물과 식은땀이 범벅이 된 채 주위 군사들의 부축을 받고 겨우 일어섰다.

인목대비는 즉시 강화도로 떠날 것을 명령했다.

반정이 완성되자 인목대비 폐모론을 상소했던 관리들이 모두 참수됐다.

광해군의 외교 노선을 지지했던 대다수 관리들도 처벌을 받았다.

참수된 자는 약 40명. 숙청 대상자는 약 200명에 이르렀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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